가해자들에게 사과하다

학교폭력 신고

by 연필심

고등학교 3학년, 교내 학교폭력 담당 부서에 신고를 하였다.


[피해 사실 요약]

가해자는 여자 동급생 2명이었고,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부터 3학년 1학기 때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괴롭힘을 당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부터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동급생 2명이 나를 보며 키득키득거렸고, 귓속말을 하며 비웃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욕적인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야 저기 니 남친 지나간다.”

“Your boyfriend”

“빨리 가서 꼬리 쳐봐”


등의 말을 하며 본인들끼리 나를 조롱하였다.


수치심을 느꼈다.

내 잘못이 없음에도 해당 동급생들이 보이면 긴장을 하게 되었고 불안했다.

움츠러들었다.

일부러 마주치지 않으려 피해 다니기도 하였다.


고3 6월, 나는 학교폭력 담당 교사를 찾아가 위 동급생들을 학교폭력 가해자로 신고하였다.



[삼자대면]

피해자인 나, 가해자 동급생 2명,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담임교사 2명, 그리고 학교폭력 담당 교사 1명, 이렇게 6명이 3학년 교무실 옆 빈 공간에서 모여 삼자대면을 하였다.


가해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당 발언을 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해당 발언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다른 남학생이다.’


교사들도 가해자들에 동조하였다.

삼자대면의 분위기는 내가, 잘못이 없는 동급생 2명을 무고하게 신고했다는 식으로 흘러갔다.

즉 나는 마녀사냥의 가해자로 몰린 느낌을 받았다.


당시 난 정말 내가 잘못했고, 내가 가해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려웠고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이성적 사고가 마비가 된 듯하였다.


그리고 난 가해자들에게 사과를 하였다.

두 차례나.


해당 사건은 가해자들에게 어떠한 징계나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다.



삼자대면 다음 날 아침,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 내가 당했다.’


가해자들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거다.

가해자들 말대로 발언 사실은 인정하나

그 발언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타 남학생 E였다고 한다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차례 모욕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마다

우연의 일치로 E가 내 근처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E와 나는 전혀 친하지 않은 사이였고

그래서 E와 함께 복도를 걸어간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언어폭력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제삼자가 들었을 때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를 통해

나의 주장의 타당성을 높여야 가해자들이 처벌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나는 입증하지 못했고, 가해자들은 빠져나갔다.


무기력했다.

당시에는 스스로가 미웠다.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아도 모자랄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사과를 했던 내가.


지금도 스스로를 탓할 때가 있다.

어이없을 정도로 내 권리를 찾지 못하고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던 나 자신이 수치스럽다.



[담임교사의 태도]

“왜 나한테 먼저 말 안 했어 이 놈아”


신고 당일, 담임교사는 나를 마주치자마자 이렇게 말하며 내게 화를 냈다.


피해자가 학교 폭력을 신고하기 전,

담임교사에게 먼저 보고하거나 허락을 맡아야 할 의무는 당연히 없다.


그리고 신고 한 달 전, 해당 여학생들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담임교사에게 말하였다.

하지만 담임교사는 이를 듣고도 방치하였다.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게, 담임교사인 본인에게 학교폭력 신고 여부를 말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본인과 상의하지 않았다며 나를 혼냈다.



[친구라 믿었던 이들에게]

학교 폭력 신고 당일, A4 3장 분량의 신고서를 제출하였다.


신고서 2부를 만들었다.

한 부는 제출용.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당시 내가 친구라 생각했고 믿었던 동급생들에게 보여주었다.


몇몇 동급생들에게 들은 말은 다음과 같다.


한 동급생은

“야 이게 학폭이면 나는...”

이라는 말 뒤에 본인의 고통을 말하며 내 사건은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였다.


다른 동급생은

“근데 왜 하필 지금...?”

이라 말하며 왜 하필 기말고사 1주일 전에 신고를 하냐며 의아해하였다.


또 다른 동급생은

“솔직히 별 거 아니잖아”

“매일 그런 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건과 비교하며) 사건의 크기와 정도를 봤을 때 너 사건은 별 거 아니지”


네 고통이 내 고통보다 더 크다고 주장하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기말고사고 뭐고, 괴롭힘 때문에 어떤 공부도 손에 안 잡히고 매일이 지옥 같았는데...

나는 사건의 크기와 정도에 관한 이성적인 분석을 바란 적이 없는데...


사실 나는 학교폭력 가해자들로부터 괴롭힘이 멈추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의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매우 컸다.


위로를 받고 싶었다. 많이 힘들었겠다고.

그런 나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당시로서는 학교폭력 신고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돌아온 반응은 잔인했다.


그리고 학교폭력 사건 자체만큼,

아니 학교폭력 사건보다 더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믿었던 이들의 잔인한 반응이었다.


내 상처의 크기와 정도를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5년이 지난 지금]

내가 생각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정의는

해당 사건이 내 기억 속 하나의 조각, 파편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즉 트라우마 사건과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감정이

현재 나의 발목을 잡거나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상태다.


이 사건은 그나마 내 기억 속 하나의 파편으로 남은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고3 2학기부터 상담을 처음 받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쳐온 많은 상담사들과 주변의 신뢰할 만한 사람들에게

나의 트라우마를 말할 때 항상 말했던 것이 이 학교폭력 사건이었다.


나의 트라우마 중 가장 많이 직면한 사건.

그래서 다른 상처들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 생각한 사건.


하지만 절망스럽기도 하다.

이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느끼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5년이다.


물론 이 사건도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 기억으로 아프고,

여전히 이 기억과 관련된 여러 감정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다른 트라우마들과 비교했을 때 그나마 힘든 정도가 덜할 뿐이다.



이 트라우마는 몇 년 뒤 전혀 예상치 못한 시공간에서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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