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피아윤 Aug 04. 2024

나의 아픈 손가락

우리 가족은 ING



어렸을 때 나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았다. 소위 부산 8 학군이라는 곳에서 자라서 나름 볼거리, 즐길 거리 다양하게 경험하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IMF의 여파가 우리 집을 비켜가지 않았고, 아빠의 사업은 몰락했다. 그때 당시 대학 2학년..

세상 물정 모르고 살던 내가, 학비며 간소한 생활비 정도는 내 몫으로 돌아왔고, 8살 아래인 동생은 겨우 중학생이었는데, 사춘기 내내 부모의 부재 속에서도 매일 찾아오는 빚 독촉을 묵묵히 받아내야 했다. 불행 중 다행히 일찍 철이 든 것으로 큰 탈 없이 커 왔고, 공부를 곧잘 했기에 고등학교 내내 학생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얼마 전 동생과 이야기하다 깜짝 놀란 것이, 고등학교 다닐 때 참고서 살 돈이 없어서 전 학년 선배가 버린 폐 문제집을 주워서 공부했고, 교과서밖에 없었기에 교과서만 미친 듯이 공부했다는 말에..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나름대로 용돈도 챙겨주고 했던 것 같은데, 나 역시 장학금 받으며 생활을 해야 했고, 집에 들어가는 최소한의 생활비도 벌어야 했으니 미처 신경 쓰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철이 일찍 든 남동생은 본인이 부담주기 싫었기에 자기 자리에서 성실히 보내지 않았을까..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하고 가슴 아팠다. 생각해 보면 동생의 친한 친구들은 죄다 고액과외에, 강남 못지않은 정보력으로 뒷바라지하는 엄마들이 많은데, 사춘기 시절을 학교 장학금으로도 모자라 매번 급식비도 밀리는 본인의 상황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내신 성적과는 다르게 수능시험을 너무 못 봐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지만, 대학 시절 내내 수많은 공모전과 학교 장학금으로 스스로 멋진 인생을 살아내는 동생을 보면서 참, 대단한 놈.. 무서운 놈..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예상했겠지만, 원래 사이가 좋지 않던 부모님은 아빠 사업의 부도와 함께 오랜 별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렇게 서서히 우리 가정은 붕괴되어 갔고, 얼떨결에 시집보낸 딸이 십여 년 뒤 이혼하는 것을 보신 뒤 애석하게도 두 분도 이혼을 하셨다.

이혼하기 전에는 그래도 한 번씩 왕래도 있고 연락도 하셨는데, 내가 이혼한 뒤로 엄마는 모두에게 연락을 끊으셨다. 아마도 내 결혼을 반대한 엄마였기에, 나의 이혼에 대한 책임을 아빠에게 다 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다. 그렇게 나는 불효를 했고, 아직 그냥 피하는 중이다.


나는 어릴 적 할머니, 증조할머니, 삼촌 두명과 함께 18평 아파트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가능한가 싶지만 내 친구는 딸 다섯과 부모님까지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도 살았던걸 보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나 싶다. 대가족 속에서 자랐기에, 할머니, 삼촌 사랑은 듬뿍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그만큼 가족 간의 갈등이 많았기에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싸움은 이틀이 멀다 하고 벌어졌다. 그 좁은 아파트에서 삼촌들 장가 다 보내고, 증조할머니 돌아가신 후 내 동생이 생겼으니, 8살 차이쯤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증조할머니가 바라던, 늦둥이로 태어난 귀한 아들은 외로운 아이였다. 부모님이 맞벌이라 바쁘기도 했고, 시간이 나면 엄마는 대부분 나와 이야기를 하던가, 우리가 좋아하는 공연을 보러 다니곤 했기 때문에 어린 남동생은 할머니와 매일 집에서 티브이와 책을 많이 보면서 컸다. 엄만 누나만 좋아한다는 투정도 꽤 많이 부렸던 것 같은데, 내가 아이를 키우며 비교해 보면 어린 내 동생은 정말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란 것 같다.한참 신경 써줘야 할 초등 6학년때부터 집이 힘들어져서, 혼자 이겨내야 했고 엄마 역할을 내가 대신한 부분이 많았지만 부모의 사랑과는 많이 다를 테다. 그래서일까.. 동생은 어릴 때부터 성공에 대한 갈망이 크다. 본인이 바로 서지 않으면 가정을 지킬 수 없다는 신념이 뼛속까지 새겨져 있다. 어릴 때 의지하던 누나의 실패를 지켜보고, 가정의 붕괴를 몸소 겪었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신중함은 말할 것도 없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며 냉철해서 표현은 잘 안 하지만 다정한 성격이라는 것은 나는 안다.  



그런 동생이 얼마 전 본인의 회사에 와 줄 것을 당부했다. 회사에서 임직원 부모님을 초청하는 이벤트에 본인이 당첨되었다고, 엄마의 빈자리를 내가 채워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아마 부산에서 오셔야 하는 아빠를 본인이 전적으로 (엄청 바쁜 시즌이라 회사에서 밤새는 경우가 많다) 모시고 다닐 수 없기에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혹여나 내가 아빠를 모시고 다니며 써야 할 돈이 부담될까 봐 미리 나에게 쇼핑비 명목으로 입금도 해 준 뒤였다. 8살 아래 동생이 맞나할 정도로.. 마음 씀씀이가 항상 넉넉하다. 그 행사는 회사가 처음으로 임직원 부모님들을 초청해 사옥 투어 및 김창옥 쇼, 가족 만찬으로 마무리되는 행사였다. 태어나서 이런 극빈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회사에서 준비를 아주 잘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자녀들이 무얼 먹는지, 어디서 일을 하는지 회사 곳곳을 투어 했다. 누나인 나도 감회가 새로운데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랴...

회사가 방송국이라, 평소에 구경할 수 없는 스튜디오며 레코딩실 등..다른 부모님들은 자리에 앉아서 이리저리 기념사진도 찍는데 무심한 부산 양반인 아빠는 내가 사진 찍어드린다는 말에 '머 하러.. 괘안타' 하시고는 자꾸 멀찌감치 달아난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헤아려지니 또.. 아빠를 보는 내 마음이 짠하다. 김창옥 쇼도 보고, 가족끼리 회사에서 제공하는 코스요리를 만끽하며 오랜만에 '가족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에 셋이 앉아 얼마나 수다를 떨었는지.. (참고로 이 두 남자의 언변은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 사실 그날의 이벤트에서 난 부모가 아니었기에 그 자리에 앉은 내내 불편한 마음이 있었지만 동생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되었다. 자녀들이 보내는 영상 중에  동생이 한 말..

"우리 집은 다른 가정처럼 화목하지 못해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속상하지만, 나로 인해서 우리 가족을 화합하고 사랑 넘치는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그 말이 나를 반성하게 했다. 난 큰집의 맏딸로서 아직 동생만큼 탄탄하게 자리도 못 잡았고, 평소에 친정식구보다는 항상 내 식구, 시댁 식구를 먼저 챙기게 되는 내가 동생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우리 가족은 붕괴되었고, 회복되지 않았으며, 그 공백이 너무도 길었기에 가족이라는 의미 또한 나에게 크지 않았다. 어쩌면 나에겐 피하고 싶은 곳이었고, 그래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는 말만 굳게 믿은 채, 그 공간에 나의 동생을 방치시켜 놓았다. 그렇게 나의 암흑기는 끝이 났고, 지금의 남편과 너무 좋으신 시부모님을 가족으로 채워진 후에야 남겨진 가족이 보였다. 그사이.. 항상 어린 줄만 알았던 동생이 언제 이렇게 자라서 가족을 대표하게 되었는지.. 미안하고 대견하다.

나에게 가족은 이제 ING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사랑과, 배려와, 이해와 존중의 총량을 남은 인생동안 아낌없이 쓰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집안 장손인 내 동생.. 나에겐 아픈 손가락이자 자랑스러운 동생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못해준 것 같다. 말 안 해도 알겠지 하는 믿음이 서로 있지만, 그래도 이번엔 꼭 해줄 거다. 내 동생이 처음으로 제작한 방송이 꽤 의미있게 종영되었다. (내 동생은 TVN 예능피디이다.)

공교롭게도 방송내용이 가족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한 방송이다. 이 방송을 만들면서 얼마나 마음이 먹먹했을지, 그의 가정사를 아는 나는 참 애잔하다. 그래도 누구보다도 따뜻한 방송을 만드는 것을 보며, 그런 가정도 충분히 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인다. 앞으로 나의 가족은 '아픔', '아쉬움', '책임감' 이런 단어보다 '따뜻함', '다정한', '즐거운'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가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꼭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랑과 배려가 넘치는 가족이 될 것이다.

이전 11화 관계의 어려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