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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6. 2024

5.3 – 키에르케고어와 니체의 길

5 - ‘죽음’과 나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더 이상 내가 좇아 살아온 삶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 절벽을 만나게 된다. 방향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릴 수도 있다. 그리고 옆으로, 뒤로 펼쳐져 있는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새로운 경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새로운 절벽을 만나게 된다. 수 없이 방향 전환을 거듭하며, 어느새 지형지물은 익숙해진다. 서서히 드러나는 지도의 윤곽을 보며 깨닫는다. 고립된 섬. 이 모험의 끝에는 단지 사방팔방으로 뻗어있는 절벽만이 있을 뿐이다. 절벽 아래는 죽음, ‘모든 의미의 낭떠러지다.


또 우리는 온갖 이야기를 수집하며, 내 의미를 담아 줄 커다란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수많은 이름들이 등장하고 다시 사라진다. 드디어 그 속 어딘가에서 내 이름을 찾아낸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 또한 찾아낸다. 이름들이 사라진다. 아직 내 이름은 남아있다. 사라진 이름들에 주목해 보지만, 이어지는 것은 커다란 여백일 뿐이다. 어떤 이름에 주목해 보더라도, 이 여백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주치는 모든 이름들을 가차 없이 지워낸다. 나의 이름, 나의 이야기에 주목해 본다. 이 이야기 끝에도 여백은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내가 도착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주춤거리며, 힘차게 내디뎌온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본다. 그러자 여백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여백이 내딛는 성실하고 거대한 발걸음 앞에 전율하게 된다. 여백은 다가오며, 내가 ‘앞을 향해’, ‘미래를 향해’ 던져 놓았던 모든 ‘꿈과 의미’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쌍안경을 집어 들고 여백 너머를 바라본다. 여백 뒤에는 여백이 있을 뿐이다. 불안마저, 고통마저 사라져 간다. 오직 중요한 것은, 저것이 나의 진정한 결말인지, 아닌지 정도일 것이다. 모든 선택지들은 흐릿해진다. 또렷해진 선택지는 오직 두 갈래 길, 키에르케고어의 길니체의 길뿐이다.


사랑 한 순간, 기쁨 한 순간.

 모든 건 다 영원할 수가 없다는 걸, 잠시 뿐인걸,

 이제야 알았어.

 모든 걸 뺏겨버리고 모든 게 떠나 버리고 .”*

 * 리쌍(Feat. 황정민, 류승범)의 곡, <누구를 위한 삶인가> 가사.


‘투쟁’, 내 의지를 부정하는 다른 이들의 의지들과의 충돌 속에서, ‘우연과 운명’, 원인도 알 수 없고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 괴로운 사건들 속에서, ‘죄악과 범죄’, 의도하지 않았던 혹은 어쩔 수 없었던 내 잘못된 행동들과 결과들 속에서, 내가 의미를 담아 온 여러 그릇들은 금이 가고, 깨어진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삶 자체를 산산조각 내는 ‘죽음’ 속에서, 격통과 함께 내 행복과 의미들은 결국 최종적으로 취소된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어거스틴의 순례자들* 내세와 영혼이라는 새 그릇을 만난.

* 어거스틴부터 야스퍼스에게까지 이어지는 순례자의 계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 선교사 하스데반의 찬양곡,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의 가사.


이것이 바로 쇠얀 키에르케고어가 대표되는 ‘신앙의 도약’이다.


잘못된 선택과 결과에 관한 불안과 공포, 불안이 초래하는 또 다른 잘못된 선택, 잘못된 선택이 낳는 또 다른 불안, 삶은 끊임 없이 재생산되는 오답과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다. 이를 해소하고자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던 삶을 떠나 윤리적인 선행을 향해 진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유한한 삶 속에서는 이러한 번뇌와 윤회의 굴레를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 탈출구는 하나 뿐이다. 절벽 앞에 놓인 바로 저 무한한 여백 말이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크고 무한한 저 진공, 저 여백이야말로 유한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진정한 포괄자다. 죽음이라는 고통과 불안의 최종장을 관통하는 궁극의 ‘의미’가 있다. 이생보다 더 아득히 크고 초월적인 저 포괄자(여백) 안에서의 ‘꿈’ 말이다.


다른 길도 있다.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 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 신해철의 곡, <민물장어의 꿈>의 가사.


의미의 여백, 삶과 꿈의 여백을 대하는 또 하나의 대안은 바로 허무를 수용하는 길. 니체가 열어 놓은 ‘초인의 길’이다.


지평선처럼 물러나는 세월조차 죽음 뒤로는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한다. 죽음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지만 반드시 나타나는 꿈과 의미의 낭떠러지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 끝에 있는 보편적인 종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멀리서 보이는 이 여백을 눈 앞으로 가까이 낚아채 올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리고 그 허무와 종말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간다. 다른 커다란 이야기 속에 내 자리를 두는 대신, 확실한 종말이 있는 내 작은 이야기 속에 꾹꾹 눌러 온 세상을 담기로 한다. 그에게 포괄자는 오히려 나 자신이다.


사르트르 역시 맹목과 허무에서 비롯된 자유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이 여백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된다. 스스로 있는 자’, 스스로 되기로 한 나 자신이 된다.* 그는 맹목 속에서 타인들이 덧씌운 온갖 목적론적인 멍에들을 훌훌 벗어던진다. 그리고 이 여백 위에 덕지덕지 떡칠하는 것이다. 나의 색, 나의 의미, 나만의 본질을 말이다. 그는 또한 키팅 선생처럼 우리에게 속삭인다. 너 또한 그렇게 하라고. 이 빈 종이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함께 지켜보자고 말이다.

* 성서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야훼 신이 모세에게 가르쳐 준 자신의 이름. 야훼’라는 이름과 관련해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 이름(야훼)이 해당 구절에 등장하는 소개문, 즉, 스스로 있는 자’ 혹은 ‘나는 내가 되기로한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라는 선언(에흐예 아셰르 에흐예)의 약칭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동료인 카뮈의 주장도 비슷하다. 그는 뜬 눈으로 이 의미 한계와 부조리한 삶을 직시한다. 이 세상은 모두가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한없이 낯설기만 한, 이상한 곳이다. 어떤 이들은 키에르케고어처럼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을 외치며 초월자를 향한 순례를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이들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연발하며 의미 여백의 절벽을 향해 투신한다.


카뮈에게 전자는 부조리에 눈을 감는 행위지만, 후자의 선택에는 논리적인 하자가 없다. 그 역시 이 절벽을 향해 지금 당장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미리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반항심을 느낀다. 허무를 향해 피어오르는 분노. 그는 결심한다. 조리 있지 못한 이 세상을 향해 저항할 것을 결심한다


모든 제안을 거절한다. “이것이다.” “저것이다.”하는 모든 의미에 관한 제안을 엿 먹이며 말한다. “그것이 아니다.” 펜 하나를 집어 들고 여백 위에 줄을 긋는다. 그는 서사시를 새로 쓴다.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이방인들의 신화 말이다. 그리고 그가 말한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의미다.”


그런 그에게 망치를 든 한 철학자가 다가와 묻는다. “영원히 그것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가?” 그는 대답할 여유조차 갖지 못한다. 새롭게 창작된 삶의 의미를 짓밟으려는 구도자들의 발길질 때문이다. 덧없이 쓰여진 모두의 이야기를 지키려 허리 숙여 감싸 안는다. 반항아를 대신해, 망치를 든 허무의 시조가 대답한다. “철저히 온 힘을 다해, 기꺼이, 덧없이, 나만을 위해, 그러나 모두를 위해, 영원토록….”


사진: Unsplash의 Fabio Jock


불안과 고통과 죽음은 모두 삶의 한계와 의미 여백에 관한 논란이다. 의미 여백의 기로에서 우리는 결국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믿을 것인가,

만들 것인가.


받을 것인가,

줄 것인가.


동서양 모든 종교와 철학의 실존에 관한 통찰 역시 이 두 가지 길로 요약된다.


묵시의 길과 해탈의 길,

창조된 길과 창조하는 길.


여백에 관한 해석 역시 두 개의 길만 있을 뿐이다.


저 여백 속에 신비한 의미가 가득차 있다고 믿는 길,

나만의 고유한 의미를 이 여백 위에 직접 눌러쓰며 채워가는 길.


영원히 끝나지 않는 커다란 이야기에 포함되는 길,

죽음으로 완성될 자기 서사 속에 이 세상을 담아내는 길.


유한한 삶의 무상성 때문에 영원을 향해 도약할 것인가,

영원 없음을 직시하고 유한한 삶을 영원토록 긍정할 것인가.


두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이 기로에서 선택은 오롯이 나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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