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관의 시대별 변천: 옛날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생각했대!
제겐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동생의 존재는 엄청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동생이 있는 분들은 어느 정도 공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부모님의 사랑이 듣도 보도 못한 존재에게 옮겨가고, 한순간에 관심에서 밀려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집의 중심이 나였는데 갑자기 자리를 뺏긴 것 같았던 거죠. 지금은 내가 중심이 아니고, 될 수도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세상이 뒤집히는 일 같았습니다.
고작 우리 집의 중심이라는 자리에도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데, '우주의 중심'은 어떨까요? 단순히 '우주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의 가운데'라는 의미만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결정하고, 세계의 근원과 연관된 요소였을 것입니다. 시대별 우주관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주의 중심이 변화해 가고, 우주의 운동에 대한 설명이 더 정교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별 우주관과 이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철학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01. 고대의 우주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부터 프톨레마이오스까지
우주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일찍부터 이어져왔습니다. 여러 문화권에서 우주관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고대 우주관은 현대 우주 과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약 기원전 3000년, 나일강 유역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이미 정밀한 천문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천문 관측은 종교적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이 천체의 움직임을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양이 뜨고 지는 현상은 태양신이 움직인 결과고, 일식과 월식도 신이 일으키는 현상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때의 천문 관측은 꽤나 전문적이고 정밀했습니다. 다양한 천문 관측 도구들이 이용되었고, 정밀한 천문 관측 데이터가 축적되었습니다. 그 결과, 고대 이집트인들은 1년이 365.25일이라고 계산했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성취는 고대 그리스에서 천문학이 발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관측 데이터에 자신들의 철학적 사유를 더해 독창적인 우주관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관찰 가능한 현상으로부터 '불변하는 질서'를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우주의 구조와 작동 원리에 대해 이들이 제시한 다양한 이론들은 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에우독소스의 '동심천구 모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우독소스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당시의 가장 정교한 천체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에우독소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개의 동심원 천구로 우주를 설명했는데, 이를 '동심천구 모델'이라 합니다. 여러 겹의 구형 천구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에우독소스의 모델은 당시로서 매우 정교한 수학적 계산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가 이와 같이 회전하는 여러 개의 천구를 사용한 것은 관측된 개별 천체들의 복잡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수학적 계산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천문학과 수학의 결합을 통해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이는 이후 이슬람 천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독소스의 모델을 기반으로 자신의 우주관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그는 에우독소스와 마찬가지로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개의 동심원 천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겹의 천구가 회전운동을 함에 따라 천구에 위치한 천체들이 완벽한 원운동을 하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지상계와 천상계로 구분했습니다. 그는 물, 불, 흙, 공기의 4가지 원소로 지상계가 구성되어 있는 반면, 천상계는 에테르라는 제 5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 역시 천상계의 물질인 에테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완전한 운동인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다른 자연과학 분야와도 연결되어 있는, 포괄적인 우주관이었으며, 이후 중세시기까지 서양 과학의 기초로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대 우주관은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완성됩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후 2세기 경 활동한 그리스-로마의 천문학자로, 그가 완성한 우주관은 '알마게스트(Almagest)'라는 책을 통해 정리되어 1400년 동안 서양 천문학의 기본 구조로 군림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 우주관을 받아들였고, 이를 체계화하고 정교화했습니다. 그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우주의 바깥 경계는 항성들이 위치한 '항성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항성천구 안쪽에는 '행성천구'가 있는데, 태양계 행성들이 각각의 천구에 위치하여 회전 운동을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때, 지구에서부터 가까운 순서로,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천구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는 우주관에 '주전원 시스템'을 확장해 도입했습니다. 주전원 시스템 하에서 천체들은 큰 원(주원)을 그리며 회전운동을 하는 동시에, 각각의 천체는 '주전원(Epicycle)'이라는 작은 원을 그리며 회전합니다. 이러한 주전원 체계에서는 주전원들의 크기와 회전 주기를 조정함으로써 각 행성 운동의 양상 및 특징들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델은 이전의 모델로는 설명하지 못했던 천문 현상들에 대해 상세하고 정량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설명한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 행성의 역행 운동과 행성의 주기적 밝기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대부분 서쪽에서 동쪽으로 ‘순행’하다가, 때때로 방향을 바꾸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역행 운동’을 하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역행 운동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해서 나타났으며, 이 다섯 행성은 역행 운동을 할 때마다 밝아지는, 주기적인 밝기 변화를 보였습니다.
현대 우주관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을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서로 다른 속도로 공전하면서 생기는 상대적인 운동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고대 우주관에서는 지구가 공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필요했고, 주전원 체제는 이런 점에 있어 효과적이었습니다. 주전원은 주원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전원이 주원의 바깥쪽을 돌 때는 둘이 나아가는 방향이 일치해 주원과 주전원의 회전 속도가 합해져 상대적으로 빨리 회전하게 됩니다. 반면, 주원의 안쪽을 돌 때에는 둘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고, 주전원의 회전이 주원의 회전을 상쇄해 역행 운동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전원 시스템 하에서는 행성이 주원의 안쪽을 돌며 역행 운동을 할 때에는 지구와 가까워지기 때문에, 행성의 주기적인 밝기 변화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전원 체계만을 이용하여 진행한 행성 위치 예측값은 실제 관측과 상당한 오차가 있었습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심원(Eccentric)', '이심', '대심(Equant)' 등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우주 모델에서 행성이 도는 큰 궤도를 '이심원'이라 하고, 이때의 중심을 '이심'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지구는 이심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이심을 기준으로 지구와 대칭되는 위치에 있는 점을 '대심'이라고 칭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이 대심을 기준으로 동일한 각속도로 회전하는, 부등속 원운동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천체들의 운동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균일한 원운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적으로 이상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유지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천체 운동에 대한 완전하고 상세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로 완성된 고대 우주관은 이후 르네상스기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표준 모델로 여겨졌습니다.
02. 스콜라 철학과 중세 우주관
그리스의 우주관은 중세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상징주의와 결합하였습니다. 중세시대 우주관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이론을 큰 틀로 하고, 기독교 교리를 결합시킨 것이 특징적입니다. 중세시대 우주관 하에서 우주는 완벽한 천상계와 불완전한 지상계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최외각 천구 너머에 신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체의 운동과 수, 배열에는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이렇게 확인된 우주의 질서와 조화는 신에 의한 완벽한 창조의 증거로 해석되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 교리와 고대 우주관을 조화시키려 한 대표적인 시도입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발전한 기독교 철학의 주요 흐름으로,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번성한 철학 사조입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수학적 모델을 개발했습니다. 이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를 기반으로 하되, 이를 기독교적 세계관과 일치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을 기반으로 해 천구의 수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7개의 행성 천구(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가 창조의 한 단계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며 천구의 수를 창세기에 나오는 7일 창조와 연관 지었습니다. 중세 우주관에서는 고대 우주관에서부터 이어져 온 7대 행성 체계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창조의 단계에 대응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일부 학자들은 7개의 행성 천구에 항성 천구와 최외각 천구를 더한 9개의 천구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9위의 천사 계급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행성의 운동에도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우선, 스콜라 철학자들은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신의 완전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행성이 보이는 역행 운동을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섭리 사이의 관계와 대응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행성이 정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신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죠. 이렇듯 중세 시대에는 우주의 구조와 운동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신의 창조 질서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믿음이 보편적이었습니다.
03. 코페르니쿠스, 우주의 중심을 옮기다
긴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 우주관은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격변은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시작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으며,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원형 궤도로 공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지구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동시에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항성들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은 사실 기존에 존재하던 프톨레마이오스 행성 모형을 관측 현상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수행하던 중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기존 우주 모델은 관측값들과의 일치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점차 복잡해졌습니다. 점점 더 많은 주전원들이 추가되었고, 새로운 가정과 설정들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맞바꾸면 좀 더 조화롭고 간편한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동설은 천체의 운동을 기존 체계보다 단순하고 조화롭게 설명할 수 있었고, 당시 천체 관측 데이터들과도 더 정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동설은 행성들의 공전 주기와 거리 관계를 자연스럽게 설명 가능했고, 행성의 역행 운동과 같은 난제로 여겨졌던 현상들도 쉽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고안한 이러한 태양 중심 모형이 '물리적 실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계산술'에 불과하다고 본 반면, 태양 중심 체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조화로운 우주구조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태양 중심 체계를 현상을 좀 더 잘 설명하고, 계산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단순 가설로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천문학에 있어서의 도구적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활용도는 있으나, 실재하는 우주의 모습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현대 사회에서 코페르니쿠스는 근대 과학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의 이미지로 자주 그려지곤 합니다. 태양 중심 체계는 인간 중심적 우주관에서 나아가 더 넓은 우주관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후속 연구의 토대로서 근대 과학 혁명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혁명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보다는 기존의 것을 고수하며 더 완전하게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과학혁명'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토머스 쿤은 기존의 체계를 강화하고 보완하려는 시도에서 오히려 혁명이 시작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쿤은 코페르니쿠스를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라고 칭합니다.
04. 갈릴레오와 지동설: 종교와 사회를 중심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에게 익숙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개량한 망원경을 통해 여러 관측을 하면서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우선, 그는 목성 주위를 도는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는데, 이는 지구가 우주의 유일한 중심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반박했습니다. 또한, 금성의 위상 변화를 관찰해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나아가, 갈릴레오는 자신의 망원경을 통해 달 표면에 산과 분화구가 있음을 발견하고, 태양의 흑점과 이들의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였습니다. 즉, 달이 완벽한 형태의 구가 아니며, 태양의 표면 역시 완벽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는 기존 우주관이 말하던 완벽하고 완전한 천상계와 대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체계에 대한 반응과 마찬가지로, 갈릴레오의 발견과 주장 역시 '물리적 실재'에 대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갈릴레오의 발견들은 다수의 천문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부분적으로 타파하고, 지구중심설이 부분적으로 틀렸을 수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로 받아들여지긴 했으나, 태양 중심 체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로서는 역할하지는 못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의 이론이 합리적이며 현상과 잘 정합한다는 평가가 있었음에도 실제 보편적 우주관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에는 당시 사회의 인식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천문학과 자연철학 사이에 위계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 철학은 세계의 궁극적인 원리에 대한 것이고, 천문학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구체적인 현상들을 설명하고 계산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이렇게 위계를 갖는 분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문학 분야의 일에 효과적인 이론이라고 해도 자연 철학적인 세계관과 무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즉, 태양중심 체제를 물리적 실재로서의 우주론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수리 천문학의 계산 기제를 보다 발전시키는 계산 모형으로서는 인정하는 분위기가 보편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갈릴레오는 우주에 수학적 조화와 질서가 존재한다고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그는 달 표면의 관측, 태양 흑점의 관측, 목성 위성 발견 및 금성의 위상 변화 등과 같은 일련의 천문학적 관측들을 통해 태양 중심 체계의 물리적 실재성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믿음이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노력을 했습니다.
갈릴레오가 메디치 가문에 접근한 것은 이러한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갈릴레오는 1589년 피사 대학의 수학 강사로 임명되면서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에게 수학을 가르쳤고, 이를 계기로 메디치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1610년, 이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들을 '메디체안의 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갈릴레오의 이러한 발견과 헌정을 크게 반겼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고대 신화와 연결시키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는데, 이는 정치적, 문화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 수단이었습니다. 코시모 1세는 자신을 로마 신화의 최고신인 주피터(제우스)와 연관시켜, 자신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때의 연관은 코시모 1세의 통치가 신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메시지 또한 전달했으며, 통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갈릴레오가 발견한 목성의 위성이 네 개라는 점은 메디치 가문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코시모 2세와 그의 세 형제의 수와 일치했기 때문이죠. 이는 메디치 가문의 '가문 신화 쓰기' 프로젝트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고,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하늘에 새김으로써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한층 더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갈릴레오는 1610년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석 수학자 및 철학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위는 자연 철학 분야에 있어서의 갈릴레오의 입지와 발언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고, 안정적인 수입까지도 제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갈릴레오에게 많은 재정적,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 2세가 1621년 사망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상황 변화로 인해 갈릴레오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떠나는데요, 이때 그가 접근한 대상이 바로 교회입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한 것으로 인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반 상식에서는 그가 지동설을 확립하고 전파하기 위해 교회에 접근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동설과 지동설의 갈등이 '이성과 신앙의 대립',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지동설과 교회의 교리의 갈등은 그 이전 시기의 과학을 가톨릭 교회가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소화해 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당시에는 우주와 천문을 이해하는 것이 신이 창조한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회 역시 천문학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우르바노 8세 교황은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견문이 넓었고, 추기경 시절부터 갈릴레오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기 때문의 그의 접근과 활동에 호의적이었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지동설과 천동설에 대해 "두 가설 모두에 대해 직접적인 증거가 있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한다"는 논지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즉, 직접적 증거를 중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이론을 선택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 가톨릭 교회가 교리를 더욱 엄격하게 해석하게 되었고, 갈릴레오의 지동설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충돌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갈릴레오가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 가설이 아닌 확실한 사실로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632년 갈릴레오가 <두 가지 주요 세계 체계에 대한 대화>를 출간하면서 작중 우둔하게 설정된 인물이 교황의 견해를 말하게끔 했고, 이것이 우르바노 8세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조롱당했다고 느낀 교황은 갈릴레오에게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이렇듯 점차 교회가 적대적인 입장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1633년의 종교재판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05. 현대 천문학으로의 발전
종교와의 갈등을 마주한 태양 중심 체계는 그 당시 사회에 바로 수용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여러 세기에 걸친 과학적 발견과 이론의 축적을 통해 점차 현대 우주관으로서 정립되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특히 요하네스 케플러와 아이작 뉴턴의 공헌이 주요했습니다. 케플러는 세 가지 행성 운동 법칙을 제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모델을 발전시켰습니다. 첫 번째 법칙은 타원 궤도의 법칙으로,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리며 운동한다는 것입니다.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이라 하는 두 번째 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일정함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조화의 법칙은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이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케플러 성과는 티코 브라헤의 관측 데이터의 도움을 받은 결과입니다. 티코 브라헤는 16세기 후반 덴마크의 천문학자로, 그는 당시 가장 정밀한 천체 관측 기구를 사용해 정확한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브라헤의 정밀한 관측 데이터는 케플러가 행성 운동 법칙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정립한 행성 운동 법칙은 지동설을 더욱 구체화하고, 천체 운동의 수학적 모델을 제공했습니다.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을 더욱 발전시켜 만유인력의 법칙을 제시했습니다.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이 각 물체의 질량의 곱을 두 물체 사이 거리의 제곱으로 나눈 값에 비례한다는 뉴턴의 중력 법칙은 우주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뉴턴 법칙을 통해 지상의 물체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뉴턴 역학은 우주를 기계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체계로 보는, 결정론적 관점을 확립시켰습니다. 이러한 이론적 토대를 기반으로, 현대에 들어서는 우주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고 우주관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공간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중력을 시공간의 휘어짐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또한, 양자역학이 등장하여 미시 세계의 법칙을 설명하였으며, 앞서 이야기 나누었던 빅뱅 이론과 관련된 여러 발견과 이론이 정립되어 우주관이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단순한 관측과 이해를 넘어, 직접 탐사하는 대상으로서의 우주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우주 탐사의 역사와 관련된 기술을 정리해보고, 그 과정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