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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Nov 12.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7

부여에 대한 자료들 (1/4)

이제까지 부여가 일어나기에 앞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과 그 일들을 통해 만들어진 상황 자료들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그러 상황이 만들어진 곳에서 비롯된 부여라는 이름에 대해서 살펴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부여에 대해 적은 자료들을 살필 차례가 되었습니다.




부여는 조선보다 뒤에 나타난 무리지만, 그 일어난 시기가 언제인지, 그 무리의 첫 우두머리는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 부여 사람들 스스로 정리하여 전한 자료 전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것들에 대해 알고자 하면, 부여 사람들 사이에 전하던 것을 부여 바깥에서 얻어 적 자료 살펴야만 합니다.


러한 으로 여겨지는 자료 가운데 하나는 논형 길험편 가운데 동명東明의 일을 적고 있는 아래 구절들[O:-⑧]입니다.  이야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주석인용한 옛 지[舊志]가  적 있데, 대부분은 같고 다만 탁리를 고리高離[P:③]라고 달리 적었습니다.


O 논형 길험편: ① 북쪽의 변방 사람들인(= 사람들 가운데) ② 탁리橐離라는 국-왕[國-王]이 ... ③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④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 ⑤ 동명이 ⑥ 달아났다. ... ● 이어 ⑦ 도읍하고[都] ⑧ 부여夫餘에서 왕 노릇을 하였다[王]. ①北夷②橐離國王...③名●④東明...⑤東明⑥走...●因⑦都⑧王夫餘
P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주석 인용 옛 기록: <① 옛날 ② 북쪽 땅[北方]에 ③ 고리高離의 국國이라는 것이 있었다. ... ④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⑤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 ⑥ 동명이 ⑦ 달아났다. ... ⑧ 동명이 ● 이어 ⑨ 도읍하고[都] ⑩ 부여夫餘의 땅에서 왕 노릇을 하였다[王]> <魏略曰舊志又言①昔北方③有高離之國者...④名●曰⑤東明⑥東明⑦走...⑧東明●因⑨都⑩王夫餘之地>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 주인공의 이름 - 동명東明이 알려주듯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일을 부여 사람들이 전하여 달리 적은 것니 곧 부여의 시작에 대료가 아닙니다. 부여에 대해 적은 자료들을 통해 부여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이 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명-성왕자리를 이은 아들을 유리-명왕라고 적고, 다리-명왕의 자리를 이은 아들을 대무-신왕이라고 적었습니다 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04월 기사는 낙랑-국의 왕이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을 신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Q-1:⑨] 었으니, 대무-신왕이라는 단어 가운데 신왕은 그를 부르던 말[號]니다. 유리-명왕의 명왕, 동명-성왕의 성왕 또한 같습니다.


Q-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여름 04월 ① 왕자王子 호동好童이 ② 옥저沃沮에서 노닐었다. ③ 낙랑(-국)[樂浪]의 왕王 최리崔理가 ④ (낙랑-국을) 나와 (옥저로) 움직였는데 ● 이어 ⑤ 그[之]를(= 호동을) 보고 ⑥ (호동에게) 물어 ● 말하기를 "● 보니, ⑦ 너[君]의 얼굴 생김새[顔色]는 ⑧ 보통 사람이(=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다. ● (네가) 어찌 ⑨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大武神王十五年)夏四月①王子好童②遊於沃沮③樂浪王崔理④出行●因⑤見之⑥問●曰●觀⑦君顔色⑧非常人●豈⑨非北國神王之子乎


그리하여 대무-신왕, 유리-명왕, 동명-성왕에서 각각 신왕, 명왕, 성왕을 제외하고 남는 것은 대무, 유리, 동명입니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 대무, 유리는 각각 신왕, 명왕의 이름인 무휼, 유리를 적은 것이니, 동명 또한 성왕의 이름을 적은 것입니다. 곧 동명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이름이니 앞서 논형 길험편과 옛 지가 적은 이야기는 바로 동명-성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러함에도 것을 부여의 시작에 대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 가운데 마지막 구절, 동명은 도읍하고 부여의 땅에서 왕 노릇을 하였다라고 적고 있는 마지막 구절 때문입니다. 동명-성왕은 부여의 땅에서 왕 노릇을 한 적이 없고, 따라서 동명-성왕은 부여의 땅에서 왕 노릇을 한 동명이 아니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명-성왕 도읍하 부여의 땅에서 왕 노릇을 하였음을 적고 있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옛 삼국사를 인용하다고 알려져 있는 동명왕편 주석은 동명-성왕이 비류-국의 왕에게 스스로 서쪽 국의 왕이라고 하였다[R-1:①]고 적고 이어 비류-국과 다투었던 일을 적었는데, 삼국유사가 인용한 국사 고려본기는 류-국과 다투기에 앞서 동명-성왕이 도읍하였다[S-1:①] 적었습니다.


R-1 동명왕편 주석: <(왕王이 말하기를 ")(나는) ① 서쪽 국國(= 졸본-국)의 왕이다.("라고 하였다.)> <(曰)①西國之王也>
S-1 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국사 고려본기: (주몽朱蒙은) 이윽고 ① 도읍하였으나[都], ② 서둘러 궁宮, 실室을 만들지 않았다. 遂①都焉②未遑作宮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동명-성왕이 졸본의 부여 이르렀다[T-1:①]고 적,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동명-성왕이 졸본에 이르러 서서 도읍하였다[U-1:-③]고 적었으니, 이 때 동명-성왕은 졸본에 있는 부여의 땅에 이르렀고  국에서 섰던 -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T-1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몽이) ① 졸본卒本의 부여扶餘에 이르렀다. ①至卒本扶餘
U-1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주몽이) ① 졸본卒本에 이르렀으며, ② (우두머리로) 서서 ③ 도읍하였다.> <①至卒本②立③都>


곧 그는 동명의 이야기와 같이 부여의 땅에서 왕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여의 땅에서 왕 노릇하였다는 일을 적은 논형 길험편의 구절을 들어 동명이 동명-성왕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간에서는 또한 앞서 고구려에서 당에 끌려갔던 연남산의 묘지에 세워진 비가 적고 있는 글에서 동명과 주몽 곧 동명-성왕이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곧 동명의 일과 주몽의 일을 나란히 적고 있고 또한 다른 물줄기 이름과 다른 일과 함께 적고 있으니, 두 사람의 일들 가운데 비슷한 것들 있었지만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니다.


V 연남산 묘지비 명문: ① 동명東明은 ② 기를 느끼고 ③ 사-수[㴲-川]를 넘어갔고[踰] ● (그리하여) ④ 국을 열었으며 ⑤ 주몽朱蒙은 ⑥ 해를 품고 ⑦ 패-수[浿-水]를 마주하였고[臨] ● (그리하여) ⑧ 도읍을 열었으니 ⑨ 위엄은 ⑩ 부삭扶索의 나루터를 적셨고 ⑪ 힘은 ⑫ 번도蟠桃의 풍속[俗]을 다스렸다. ①東明②感氣③踰㴲川●④而開國⑤朱蒙⑥孕日⑦臨浿水●⑧而開都⑨威⑩漸扶索之津⑪力⑫制蟠桃之俗


그러나 이것은 그 가운데 내용을 제대로 읽기에 앞서 품고 있던 의심을 뒷받침한다고 여기고서 그것에 맞추어 읽은 것 뿐니다.


비슷한 시기에 새겨진 김유신 비의 글을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인용하였는데, 김유신 헌원의 후손이며, 소호의 자손이다[W:-③]라고 적었습니다. 헌원과 소호라는 다른 사람의 후손 자손이라고 나란히 고 있지만, 헌원의 후손과 소호의 자손이 가리키는 것은 같은 사람 - 김유신입니다.


W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① (김)유신庾信의 비碑가 ● 또한 이르기를 "② 헌원軒轅의 후손[裔]이며, ③ 소호少昊의 자손[胤]이다."라고 하였다. ①庾信碑●亦云②軒轅之裔③少昊之胤


 자료는 각각 다른 것을 가지고 나란히 일을 적다고 해서 그 일주어들이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라점을 보여니다. 앞의 구절이 다른 물줄기를 가지고 동명과 주몽의 일나란히 적었다고 해서 그 주어인 동명과 주몽이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그 내용에서 더욱 분명 타납니다. 연남산 묘지의 비 첫번째 물줄기 사-수를 넘어간 뒤 동명 국國을 열었고[V;①-④] 두번째 물줄기를 마주한 뒤 주몽 도읍[都]을 열었다[V:-⑧]고 적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 내용은, 동명은 국을 열었지만 도읍은 열지 않고 주몽은 국은 열지 않고 도읍만을 열었다는 이상한 이야기 됩니다.


여기서 그러 일들을 적기에 앞서 2가지 다른 물줄기 이름 그 앞에  것은, 그러한 이상한 야기가 아니라, 동명-성왕이 서로 다른 물줄기가 있던 곳을 차례차례 지난 뒤 그러한 일들 하나씩 이루었음을 적으려 한 것일 뿐입니다. 곧 이것을 앞서와 같이 이상한 내용으로 읽고 들어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논형 길험편과 옛 지가 적은 동명의 이야기는 부여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이것으로부터 부여의 시작을 살필 수 없습니다.


부여 사람들에게서 그 자료의 내용이 전해질 수 있었던 시기, 자료의 내용을 보다 세밀히 살피면 그것이 고구려 동명-성왕의 이야기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고구려의 일들을 살필 때에 그리하기로 하지요. 그렇지만 이제껏 보인 것 만으로도 위의 이야기가 부여 시조 동명의 일이 아니라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일을 적은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다만, 위의 자료에서 중요한 점 하나가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도읍에 대한 것이지만 부여의 일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다음 글에서는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어 부여에 대한 자료를 살피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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