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동산이 Nov 13.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8

부여에 대한 자료들 (2/4)

부여의 첫 도읍은 어디였을까요? 앞서 살핀 논헝 길험편이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이 인용한 옛 지는 부여 시조 동명이라고 여겨 그가 부여 또는 부여의 땅에 도읍하였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니 여기서 부여의 도읍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도읍하였던 다른 곳과는 관련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고구려를 일으킨 시조 동명-성왕의 이야기를 적었는데,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본래 형태에 더 가까운 구삼국사의 내용을 동명왕편 주석이 인용하여 적었습니다. 그러한 내용 가운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내려와 부여의 옛 도읍에 노닐었다[R-2:-④]고 적 구절이 있습니다.


R-2 동명왕편 주석: <① 한漢 신작 03년 임술-년[壬戌-歲] ② 천-제[天-帝]가 ③ 태자太子를 보내니 ● (태자가) ④ 내려가 부여-왕[扶余-王]의 옛[古] 도읍[都]에서 노닐었다. ● (태자는) ⑤ 호를 ● (말하기를) ⑥ 해모수解慕漱라고 하였는데 ⑦ 하늘[天]로부터 내려오며 ⑧ 5(마리) 용 같은 말들[龍]이 끄는 수레[車]를 탔고, ● (해모수를) ⑨ 따르는 이들이 ⑩ 100명[人] 남짓이었는데 ⑪ 모두 ⑫ 백곡白鵠을 탔고, ⑬ 색색의 구름[雲]이 ⑭ 위[上]에 떠올랐는데(= 천天에 보였는데) ⑮ 소리가 ⑯ 구름[雲] 가운데에서 움직였다(= 흘러나왔다). ● (해모수가) ⑰ 웅심-산[熊心-山]에서 멈추어 ⑱ 10일 남짓을 지냈다. ⑲ 처음 ⑳ 내려와서는 ㉑ 머리에 ㉒ 까마귀깃털[烏羽]로 만들어진 관冠을 쓰고 ㉓ 허리에 ㉔ 용 같은[龍] 빛[光]을 내는 검劍을 둘렀다. ㉕ 아침에 ● 곧 (해모수가)  ㉖ (그곳의) 일들을 들어주면 ㉗ 저녁에 ● 곧 (그 일들이) ㉘ 천天에 오르니, ㉙ 세상[世]에서 ㉚ 그[之](= 해모수를) 일러 ● (말하기를) ㉛ 천-왕[天-王-郞]이라고 하였다.> <①漢神雀三年壬戌歲②天帝③遣太子●④降遊扶余王古都⑤號●⑥解慕漱●⑦從天而下⑧乘五龍車●⑨從者⑩百餘人⑪皆⑫騎白鵠⑬彩雲⑭浮於上⑮音樂⑯動雲中⑰止熊心山⑱經十餘日⑲始⑳下㉑首㉒戴烏羽之冠㉓腰㉔帶龍光之劒㉕朝●則㉖聽事㉗暮●卽㉘升天㉙世㉚謂之●天王郞>


명왕편 주석은 해모수와 따르는 이들의 모습을  뒤에, 이어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 멈추어 10일 남짓을 지내었다[R-2:-] - 내려와 노닐었다 - 고 적었습니다. 곧 웅심-산에 이르러 머물며 가까이 있던 부여의 옛 도읍에서 노닐었던 것입니다.


이어 동명왕편 주석은 - 웅심-산에 멈추어있던 해모수가 - 아침에는 사람들의 일을 들어주면 저녁에는 그 일들이 천天 - 천-제가 있는 곳 - 에 올랐다[R-2:-㉘]고 하였습니다. 모수가 있던 웅심-산에서 해모수가 아침에 일을 들으면 그 날 저녁에 천-제에게 그 일이 올라갔으니, 곧 부여의 옛 도읍이 있던 웅심-산은 천-제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명왕편 주석은 또한 본기를 인용하여 부여의 상相이던 아란불[X-1:①]이, 앞서 천-제가 자신에게 천-제의 아들, 손자가 여기에 국을 세울 것이라고 말하였다[X-1:②-⑦]고 적었습니다. 이어 부여-왕이 그곳을 떠나야 한다[X-1:⑧-⑩]고 하고 동쪽 바닷가 가섭-원에 도읍할 수 있다[X-1:-⑰]고 하며 부여-왕에게 권하니[X-1:⑱-⑲] 부여-왕이 떠나 가섭-원에 도읍하고 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X-1:-㉒]고 적었습니다.


X-1 동명왕편 주석 인용 본기: <① 그[其](= 부여-)상相 아란불阿蘭弗이 ● 말하기를 "② 어느 날[日者] ③ 천天이(= 천-제가) ④ 나에게 내려와 ● 말하기를 '(내가) ⑤ 장차 ⑥ 나의 아들, 손자에게 시키면 ● (나의 아들, 손자가) ⑦ 국國을 이곳[此]에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⑧ 너[汝]는(= 왕은) ⑨ 마땅히[其] ⑩ 이곳[之]을 떠나야 한다. ⑪ 동쪽 바다의 물가에 ⑫ 땅이 있고 ⑬ (땅의) 호를 ● (말하기를) ⑭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하는데, ⑮ (가섭-원의) 흙은 ⑯ 5(가지) 곡물들에 마땅하니 ● (가섭-원에) ⑰ 도읍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⑱ 아란불이 ⑲ 왕에게 권하니 ● (왕이) ⑳ 옮겨 (가섭원에) 도읍하고 ㉑ 호를 ● (말하기를) ㉒ 동-부여라고 하였다. ㉓ 옛 도읍에는 ㉔ 해모수가 ㉕ 천-제의 아들이라고 하고 ㉖ 와서 도읍하였다. <本紀云①其相阿蘭弗●曰②日者③天④降我●曰⑤將⑥使吾子孫●⑦立國於此⑧汝⑨其⑩避之⑪東海之濱⑫有地⑬號●⑭迦葉原⑮土⑯宜五穀●⑰可都也⑱阿蘭弗⑲勸王⑳移都㉑號●㉒東夫余㉓於舊都㉔解慕漱㉕爲天帝子㉖來都>


리고서 이어 해모수가 부여의 옛 도읍 - 부여가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기에 앞서 도읍하였던 곳 - 에 와서 도읍하였다[X-1:㉓-㉖]고 적었는데, 이 일을 동명왕편 주석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부여의 도읍에 내려가 노닐었다[R-2:②-④]고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 천-제가 아란불에게 말하였던 것들 가운데 천-제의 아들이 여기, 부여의 도읍에 국을 세우는 일이 곧 부여의 옛 도읍에 도읍한 일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그 뒤 천-제의 손자가 국을 세우는 것 또한 부여의 옛 도읍에 도읍한 일에 해당할 것입니다. 천-제의 손자란 곧 해모수의 아들이며 그 아들이 바로 주몽 곧 동명이니, 동명-성왕이 도읍한 곳 가운데 또한 부여의 옛 도읍, 해모수가 이르렀던 곳이 있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은 옛 기록을 인용하여 이 일을 적었는데, 그 뒤에 내려온 사람을 천-제의 아들이 아니라 천-제[Y-1:③]라고 적고 있지만 그 뒤 그일컬어 왕 - 천-왕 - 이라고 하였다[Y-1:-]고 적고 있으니, 내려온 사람은 천-제가 아니며 그 단어 뒤에 아들을 뜻하는 자子라는 글자가 누락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려온 사람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입니다.


Y-1 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옛 기록: ① 전한서前漢書의 선-제 신작 03년인 ② 임술(-년) 04월 08일 ③ 천-제[天-帝]가 ④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왔다. ⑤ 5(마리) 용 같은 말들[龍]이 끄는 수레[車]를 탔고, ⑥ 서서 ⑦ 도읍하니 ● (사람들이 그를) ⑧ 일컬어 ● (말하기를) ⑨ (천-)왕이라고 하였다. ⑩ 국의 호를 ● (말하기를) ⑪ 북-부여라고 하였으며 ⑫ 스스로 ⑬ 일컬어 ⑭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⑮ 해모수라고 하였다. (古記云)①前漢書宣帝神爵三年②壬戌四月八日③天帝④降于訖升骨城⑤乘五龍車⑥立⑦都⑧稱●⑨王⑩國號●⑪北扶餘⑫自⑬稱⑭名●⑮解慕漱


이어 삼국유사 기이편이 인용한 옛 기록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내려온 곳을 홀-승골-성[Y-1:④]이라고 적었습니다. 여기가 바로 웅심-산 가까이 있던 부여의 옛 도읍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아들 주몽 - 동명-성왕 또한 여기에 이르렀을까요? 위서 고구려열전은 주몽이 또한 흘-승골-성에 이르러 머물렀다[Z-1:①-③]고 적었습니다. 이어 호를 말하기를 고구려라고 하였다[Z-1:④-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세운 국의 호이니 여기의 호는 곧 국의 호이며 따라서 그가 여기에서 국을 세운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 또한 도읍하였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Z-1 위서 고구려열전: (3명[人]이) ① 주몽朱蒙과 더불어 ②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으며, (주몽이) ● 이윽고 ③ 머물러서는 ④ 호號를 ● 말하기를 ⑤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다. ①與朱蒙②至紇升骨城●遂③居焉④號●⑤曰高句麗




앞서 보인 자료들에서는 동명-성왕이 도읍하기에 앞서 졸본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졸본이 바로 흘-승골-성이며 고구려의 도읍이며 또한 부여의 옛 도읍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여 고구려의 도읍이자 부여의 옛 도읍에 이르기 위해서, 다음 글에서는 한 가지 자료를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장 4편 부여夫餘 (1)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