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동산이 Nov 25.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14

부여의 시작 (4/4)

부루가 옮겨간 흘-승골-성은 그곳의 서쪽에 있던 요동-군과, 동쪽의 길 - 압록-강을 건너 북쪽 땅에서 다시 동쪽으로 멀리 돌아 현재의 백두-산 서남쪽에서 압록-강을 건너 동남쪽으로 가서 예에 이르는 길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곳을 아우르는 진-번의 땅에 한이 진-번-군을 둔 뒤에, 무리들 가운데 우두머리들이 없어 현들을 통해 다스리기 어려웠을 때에 부여가 들어와서는 구려 사람들을 포함한 여러 무리들의 우두머리로 자리잡았습니다. 서쪽의 졸본에, 동북쪽의 환桓에 부여 사람들이 그 우두머리가 되니 진-번-군은 그들에게 물건들을 주고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따르는 무리에게 주어서는 팽오가 열었던 길을 다시 따라 예, 맥의 물건들을 가져와 한과 주고받으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길을 지키도록 주는 물건들 - 그 비용들이 다시금 문제가 되었습니다. 것을 염철론은 좌-장군이 조선을 쳐서 임둔-군을 열었지만[AD:-③], 결국 다른 길로 예, 맥이 있 곳까지를 - 예, 맥까지의 길을 - 여느랴, 연, 제 사람들이 힘들었다고 적었습니다.


AD 염철론: ① 좌-장(군)[左-將]은 ② 조선朝鮮을 쳐서 ③ 임둔(-군)[臨屯]을 열었지만 ④ 연燕, 제齊가(= 연, 제 사람들이) ⑤ 예穢, 맥貉에게(= 예, 맥의 일로) (여전히) 힘들어하였고, ⑥ 장건張騫이 ⑦ 아주 멀리(= 멀리 있는 국들[國]에) 오고가서 ⑧ 쓸모없음[無用](=쓸모없는 물건들[物])을 받아들였지만 ⑨ 관[府]의 곳간[庫]에 둔 것[藏](=쓸모있는 물건들[物])은 ⑩ 바깥 국들[國]로 흘러나갔다. ①左將②伐朝鮮③開臨屯④燕齊⑤困於穢貉⑥張騫⑦通殊遠⑧納無用⑨府庫之藏⑩流於外國


곧 창해-군을 열었을 때 그리하였듯이 조선을 깨트리고 임둔-군에 이르렀지만 그 뒤에 결국 예, 맥이 있는 곳에 이르는 길을 지키는 데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부담이 다시 연, 제 사람들에게 지워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 비용은 바로 그 길목에 자리잡아 길을 지키고 있던 부여에게 주어지는 물건들을 위해 쓰이던 것입니다.




앞서 이러한 비용이 문제가 되어 조선-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의 계기가 되는 문제점을 해소하지 않고 있다가 다시 문제점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니 이상해보입니다. 그러나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앞서 위만이 한의 물건들을 얻고 군사들의 위세를 빌리고서야 진 사람들을 보냄으로써 작은 읍들을 따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 - 낙랑-군을 통해서도 그 읍들이 있는 예, 맥의 땅에 이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깨트리고 그 땅에 군을 두었다고 해서 새로운 길이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였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옛 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첫 부분인 진-번 땅에는 우두머리가 없어 군의 다스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들에게 비용을 거두어 그곳을 지나는 길을 지키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참에 그러한 진-번- 땅에, 가까이 있던 부여 무리가 와서 다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약간의 물건들을 제공하고 길을 쓰는 것이 다시 선택가능한 해결책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앞서 창해-군에 대해 그리하였듯이 비용 들겠지만, 진-번-군을 설치한 처음에는 앞서 조선을 쳐서 깨트리면서 얻어낸 이득으로 그것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여를 통해 진-번-군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다스림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 길을 이용하는 비용을 군에서 다시 회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으니, 이 기대로 말미암아 낙랑-군과 예, 맥 땅을 잇는 길을 여는 것을 미루었던 것이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던 두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봉책은 부여의 세대 교체에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문제를 만들어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부여-왕 해부루가 나이가 많았는데 아이가 없었다고 적었으니 곧 그의 주활동시기가 끝나가는 MC-88 즈음까지 해부루의 뒤를 이을 아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부루를 우두머리로 받들며 따르던 해解 곧 조선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우두머리가 나타났습니다. 부루라는 이름 앞에 그가 다스리는 무리를 나타내는 해解가 더하여지듯이, 이 사람의 이름 앞에 또한 해가 더하여졌습니다.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아들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요. 바로 해라는 글자가 더하여진 모수입니다.


앞서 동명의 주활동시기를 기록에서 찾고, 그 1세대 앞선 사람인 금와, 금와보다 2세대 앞선 부루의 주활동시기를 찾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모수는 동명의 아버지 곧 그 1세대 앞선 사람이니 그 주활동시기는 MC-58[+30)가 됩니다. 또한 그 아버지 - 조선 사람들의 새로운 우두머리의 주활동시기는 MC-88[+30)가 됩니다.


그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적은 바, 천-제라는 호를 썼고 그 아들인 모수는 천-왕이라는 호를 썼습니다. 이것은 앞서 살폈던 바 있는 환桓이라는 곳의 우두머리였던 환-인과 환-인의 호이니, 곧 환 사람들이 또한 이 아버지와 아들을 우두머리로 받들었으며 그리하여 둘이 서서 조선 사람들을 다스리던 곳은 환이었음을 알려줍니다.


환은 고구려가 환-나-부에 두었던 도읍인 환-도가 있던 곳으로 앞서 살핀 흘-승골-성이 있던 곳과는 현재의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곧 부루가 보내 길을 지키도록 강 건너에 자리잡도록 한 조선 사람들이 있던 곳입니다. 그러한 조선 사람들이 우두머리인 부루에게 뒤이을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니, 모수의 아버지가 꾀어 그들과 환 사람들을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스리던 무리가 갈라져 등장한 새 무리는 단-군이 조선 사람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던 그 아들 부루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서 천-제의 아들 천-왕의 아들 호가 단-군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호는 그 우두머리가 더이상 단-군의 다스림 아래에 있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또한 그들이 지키는 길을 오고가는 것이 앞서와 같지 않을 것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부여의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아 잘 알고 있던 한漢달라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니, 그러한 움직임을 적은 기록들에서 앞서 이러한 점들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시, 한의 그러한 움직임과 부여의 움직임에 대해 적은 자료들을 살펴 부여에서 이어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계속 살펴도록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공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