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요란하다.
시원한 빗줄기
거실 창 밖으로 보는 빗줄기는 보기에 나쁘지 않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허둥지둥 도망치듯 뛰어가지만 안전한 곳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감상하는 나에게는 시원하기만 하다.
남편과 수목원 데이트를 시작으로 미술관 데이트, 오페라 데이트, 연주회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일요일마다 가는 여행으로 시작했지만 전시회와 음악회 일정에 맞추어 금요일 저녁, 토요일 오후에 가기도 했었다. 예술이 주는 환기,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으로 인해 사람의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달걀찜처럼 몽글해진 그와 나는 삶이 가져다주는 윤택함에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는 새벽 5시~6시 사이에는 어김없이 일어난다. 새벽부터 듣는 클래식 음악, 조용한 팝송, 명화 감상, 작가들의 삶과 그들의 철학, 우리는 점점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와 나의 대화는 신선했다. 예술이 주는 삶의 윤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우리는 안정되어 갔다. 안정과 평온함 그 평화는 우리 둘의 세계를 견고하게 해 주었다.
둘만의 단출한 생활, 단순했다.
그는 그가 원했었던 사업을 아들과 함께 하면서 그 둘은 연대감이 깊어졌다. 그리고 사업 또한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행복해졌다. 이전의 아픔은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냥 잊어져 갔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니, 기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니, 그 나쁜 기억 자체를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나는 행복해져 있었다.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나의 하루를 정리하고 그와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또 별 것 없는 무슨 이야기를 했나?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그냥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어느새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었다.
고상지 밴드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경주 예술의 전당의 <조희창의 토요 클래식 살롱>에서 준비하는 연주회가 특별히 좋았다. 손정범 피아노 독주회, 고상지 밴드가 연주하는 클로드 탱고 음악은 조희창의 설명을 중간중간 들으면서 들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음악의 세계. 그 세계에 진입하는 그 앎의 느낌이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손정범 피아노 독주회에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슈만의 '아라베스크', 리스트의 '돈주앙의 회상' 연주를 들었다. 피아노 독주회는 생애 처음이어서 남편과 나는 설레었다. 피아노 소리가 홀 전체에 퍼지면서 들리는 그 음반의 소리가 좋았다. 남편과 나는 서로 마주 보았다. 남편은 예매를 잘했다고 나를 치켜세웠다. 둘이 나란히 앉아서 좋은 음악을 들으니 마냥 행복했었다.
고상지 밴드는 고상지를 중심으로 피아노는 조영훈과 바이올린은 윤종수 이렇게 세 사람이 연주를 함께 했다. 총 9곡을 연주했는데, 가르델 '당신이 나를 사랑한 날', 갈리아노 '클로드를 위한 탱고', 고상지가 작곡한 탱고 음악 '마지막 만담', '셋을 위한 푸가', 이웃집 토토로 OST '바람이 지나가는 길',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인생의 회전목마', 피아졸라 '망각'과 '리베르탕고', '아니오스 노니노' 를 들었다. 귀가 호강하는 듯했다. 밖은 덥고 습한 데 홀 안은 아주 시원했다. 나른하기조차 했는데, 연주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사람을 홀렸다. 신비롭기도 했었다. 이런 좋은 곳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나만의 여행을 떠났다가 또다시 꿈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무슨 향일까? 풀향이 난다. (그 날의 향이 기억에 남았다.)
내 앞자리에 앉은 세 여자의 즐거운 대화의 느낌과 함께 전해져 오는 상큼하면서도 밝은 자연적인 향, 고급스럽다. 반도네온 악기에서 울려 나오는 고혹적인 탱고 음감과 고상지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듯 흘러서 시각적인 요소까지도 내 마음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준다.
그녀의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정중앙이었다. 그리고 연주자들의 모습, 얼굴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진지한 표정들, 음악에 심취한 그들의 표정들. 그들의 연주를 듣고 있는 우리들의 표정들. 삶은 진지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반도네온 악기가 무게가 있어 보였다. 그 악기를 허벅지에 올려놓고 양팔을 벌려서 양손과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어깨도 들썩, 다리도 들썩, 온몸을 쓰면서 연주하는 모습이 쥐어짜는 탱고 음악과 닮은 듯했다.
스페인에서 보았던 거리의 악사, 기타 연주를 하는 사람과 닮아 보였다. 영혼이 연주하는 듯했다.
원화홀에 사람이 꽉 찼다. 표가 매진이 됐다고 조희창은 아주 기뻐했다. 연주회가 끝나고 뜻밖에 그를 가까이에서 보았다. 홀 밖에서 직원들이 햄버거 같은 게 들어있을 것 같은 포장곽을 예매표 확인을 한 후에 1인 1개씩을 주었다. 남편과 내 옆을 그가 지나갔는데 원화홀 무대에서 본모습과 달리 키도 컸다. 마르지도 않았다. 적당히 보기 좋게 살이 쪄 있었다. 무대에서는 말라 보이고 그랬는데 남편은 생각보다 키도 크고 마르지도 않았네, 우리는 그렇게 그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햄버거 같은 빵인 줄 알았는데 브라우니와 조그마한 과자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맛은 꽤 괜찮았다.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잠시 쉴 때 커피와 같이 먹으니 출출한 배를 달래주었다.
요즘은 한국이 예술의 홍수 속에 있는 것 같다. 꽤 비싼 돈을 주어야 그런 연주회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예전의 나는 시간에 쫓겨 살아서 꿈에도 못 꾼 일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적 여유도 생겼고, 또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니 1만 원, 2만 원에도 그런 연주를 들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할인도 받을 수 있었다. 좋은 연주를 듣기 위해서 오고 가는 시간이 4시간이나 걸리고, 맛있는 저녁 대신에 오고 가는 휴게실에서 간단한 것으로 요기를 할 때도 있지만 좋은 음악은 그런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사람의 영혼이 소생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편과 좋은 추억이 켜켜이 쌓여서 무척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