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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Jul 03. 2024

글을 쓴다

나의 말 01.

  <글을 쓴다>는 말을 생각한다. 멋있다, 그럴듯하다, 뿔테 안경, 화장기 없지만 맑은 얼굴, 약간 헝클어진 머리, 은은한 커피 향기(믹스커피는 안 되고, 아이스도 탈락. 따뜻한 아메리카노여야 한다. 직접 갈아서 내린 핸드드립 커피면 더 좋고),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 벽면 가득 책으로 둘러싸인 좁은 서재, 낡은 컴퓨터 앞에 앉은 작가의 작은 책상은 알아볼 수 없는 끄적임으로 가득 찬 종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머그잔은 이미 두어 개쯤. 잔을 타고 흘러내린 커피가 바닥을 따라 고이며 종이 위에 동그라미 몇 개를 그려 놓았을 테지. 어둡게 커튼을 쳐놓은 작업실 조명 아래, 쉼 없이 끄적이고 두드리는 손가락 위로 사각사각, 타닥타닥 소리가 들릴 뿐이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결과물인 글보다, 글을 쓰는 행동 자체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책상에 앉아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로 무언가 쓰고 있는 내 모습을 작가에게 덧씌워보니, 이건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나는 그만 글을 쓰는 내게 취하고 만다.

  그가 쓴 글자들은 마법의 주문처럼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 미소도 눈물도 지어낸다. 지금이야, 눈물 한 방울 흘릴 때야. 글자들이 소리 없이 명령하면 읽는 이는 울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역과 니은이 아와 어를 만나고 비읍과 쌍시옷을 입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판 위로 날아오른다. 하얀 화면 위 까만 글자들이 새끼 꼬듯 긴 줄을 만들어간다.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대단한 모습이어야 마땅하다. 내 기준 멋있다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콜라주 하듯 모아 붙인 후, 지적인 이미지 한 방울을 추가한다. 아, 그는 또한 얼마나 어려운 사람인가. 오직 내 마음속에만 살면서, 나는 결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으니 글자 그대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글 쓰는 사람을 동경하며, <작가와의 만남>이나 <북 콘서트> 등등으로 불리는 강연회를 찾아가곤 했다. 독자 앞에 선 나의 작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출근길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낯설지 않은 아랫집 여자, 마트에서 콩나물과 대파를 고르는 많은 사람 중 하나, 복잡한 지하철 왼쪽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래도 될 만큼. 그래서 실망했는가 하면 내 대답은 “아니요.”다. 나는 오히려 안도하고 말았다.

  동화와 그림책을 낸 선배 A와는 같은 업계에서 일하며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었다. 아랫집 여자2쯤 되어 보이는 A가 어린이책 작가라는 사실을 안 후로, 다분히 의도를 가지고 그에게 접근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살았던 A에게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같이 연수를 받으러 가던 날, 나 또한 글을 쓰고 싶노라고, 어떻게 하면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냐고 물었다.

“일단 앉아서 써. 하루에 몇 줄이라도.”

  그는 매일 글을 쓴다고 했다. 현생에 치여 바쁘고 고단할 때는 한동안 멈추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쓰고 있다고. 쉽지 않지만 애쓰고 있다고 했다. A의 글쓰기 스승은 나이 오십이 넘은 A에게 너무 오래 쉬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쓰라고 잊을만하면 잔소리하신단다. 스승께 염치없고 죄송하여 다시 쓰기 시작했노라고, 혼자서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함께 글쓰기를 배웠던 문우들과 약속을 정해놓고 쓴다고 했다. 심지어 화상 회의하듯 카메라를 켜놓고.

끊임없는 잔소리,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은 약속, 타인의 감시와 검사. 꼭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이 잔소리에 마지못해 등 떠밀려 숙제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실시간 감시하는 엄마와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까지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이쯤 되니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고 마음에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위대한 작가님의 실체가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뭔가가 더 있을 거라고, 그것이 무엇이든 대단히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남다른 글감은 어떻게 생각해 내냐고, 멋진 단어와 이제껏 본 적 없는 비유는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

“써야지 싶은 게 있으면 메모를 해. 근데 메모해 놓은 수첩을 나중에 보면, 내가 쓴 건데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거든. 그러니까 빨리 써야지. 아님 까먹어. 일단 책상에 앉아. 그리고 토해내듯 떠오르는 말을 쓰는 거야.”

  탁 켜면 글이 술술 나오는 글쓰기 스위치 같은 건 없었다. A는 무려 “배설”이라는 말로 글쓰기를 설명했다.

“나오는 대로 쓰는 거야.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일단 쓰는 거지. 배설하듯이. 그리고 고치고 또 고쳐. 덜어내고 또 덜어내.”



  아이도 어른도 아녔던 이십 대 초반, 이기지도 못할 술과 싸우다 처참하게 패배한 그다음 날 아침을 떠올려 보자. 분명 내 몸속에 있던 그것을 화장실 변기에 쏟아내며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시간을 한 번쯤을 겪어 봤을 거다. 다시는 이렇게 마시지 않을 거야, 그럼 난 사람도 아니야. 작심삼일을 삼 일에 한 번씩 하던 시절이었다. 몸속에 있던 것만 토해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맨정신에는 하지 못했을, 마음속에만 꽁꽁 감춰두었던 말들을, 스무 살 유치한 감성을 듬뿍 발라 비밀 게시판에 싸놓고는 했다. 다음 카페가 널리 쓰이던 그때 익명 게시판은 가끔 내가 글을 배설하던 창구였다. 술이 깬 다음 날 익명 게시판을 클릭하는 손가락은 얼마나 무거웠던지. 틀린 맞춤법보다 겉멋 잔뜩 들어간 은유와 상징으로 마구 버무린 속내를 확인하는 것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갑자기 등장한 익명의 글을 누가 쓴 건지 추측이 난무하고 오해와 해명과 항변이 이어지는 동안, 그 누구도 나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심장 한 켠이 찌르르한 것은 안도인지 섭섭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글은 며칠 동안 친구들 입에 오르내리다가 점차 관심에서 멀어졌고 얼마지 않아 잊혔다. 나에게서조차도.

  그 카페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당시 사용했던 메일 계정을 없애고 새로 만들어 쓰고 있으므로 그 카페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때 썼던 글을 지금 다시 볼 수 있다면 고치고 또 고칠 수 있을까. 닦아내고 또 닦아내어 완성할 수 있을까. 무료하고 나른했던, 조금은 슬프고, 애를 써도 채워지지 않았던 스무 살의 마음을, 나는 이제 어떤 몸부림을 쳐도 알 수 없다. 잃어버린 귀걸이 한쪽처럼 이따금 생각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써야겠다.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는 짝 잃은 귀걸이 한쪽은 이미 많으니까. 비록 엉망으로 마구 쏟아내고 있는 부끄러운 글일지라도. 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 평범한 글 쓰는 사람이 되어, 일단 써보자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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