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더라도 왕이 되리라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멋모르던 코흘리개 아이였을 때, 세상은 얼마나 만만해 보였던가요.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적는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렸던 미래는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우주비행사, UN 사무총장, 스티븐 스필버그를 능가하는 위대한 영화감독을 꿈으로 적었습니다. 빌 게이츠를 넘는 부자도 목록에 있었습니다. 무조건 유명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죠. 다 세상의 견고함을 모를 때의 특권이 아닐까 웃음 지으며 회상하곤 합니다.
그러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점차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중1 때는 '하버드 가야지!'라고 소리치고 중3 때는 '서연고는 가겠지'라고 되뇌고, 고2 때는 '인서울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붙잡고, 고3 때는 '4년제는 가자'라고 꿈이 점차 꺾여가죠. 대학을 나와 사회초년생으로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닐 때는...... 면접관이 시큰둥한 눈빛으로 저와 이력서를 번갈아 쳐다볼 때 얼마나 한없이 초라해지던가요. 면접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실 때마다 고개는 점점 숙여지고, 어깨도 움츠러들곤 했죠. 면접 탈락 연락을 받고 터덜터덜 거리를 걷던 중에 문득 어린이 때 장래희망을 떠올리곤, 빛나던 꿈과 현실의 격차에 쓴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고백하노라면 지금도 저는 위대한 스타가 되는 몽상을 즐겨합니다. 일종의 유희인데요. 저의 한심함을 되씹다 보면 오히려 반대급부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유명인이 된 제 자신을 떠올리며 자위를 하는 것이죠. 봉준호가 황금종려상을 받는 영상을 골백번 되돌려보면서 나도 저 자리에서 전 세계 예술인의 박수세례를 받는다면 어떨까 망상을 하고, 한강 작가가 한림원에서 연설하는 장면도 프레임 단위로 집중하며 보았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하는 영광이 나에게도...... 그러다 또 면접 탈락 문자가 오면 현실로 되돌아오곤 하는 식이죠.
연장선상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82년 작 《코미디의 왕》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주인공은 루퍼트 펍킨 (로버트 드 니로)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현실은 비루한 인물입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성공한 코미디쇼 진행자인 제리 랭포드 (제리 루이스)를 스토킹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뛰어난 코미디언의 소질이 있으며 세상이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우깁니다. 물론 제리는 쥐뿔도 없는 루퍼트에게 냉담할 뿐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우상을 납치합니다. 그리곤 방송국을 겁박해 자신의 코미디쇼 출연을 약속받죠. 실제로 코미디쇼에 게스트로 초대받고 자신이 꿈꿔왔던 개그를 선보입니다. 이게 웬걸, 예상외로 그의 개그는 관중들의 박장대소를 이끌어냅니다. 그는 인상적인 멘트를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내려옵니다.
마음껏 웃으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실이에요.
내일이면 내 말이 농담이 아니고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난 평생 바보로 살기보단 하룻밤이라도 왕이 되고 싶어요.
사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루퍼트의 모습을 갖고 살고 있지 않나요? 매일의 일상은 기진하기만 하고, 반복되는 상황에 질식할 지경입니다. 나도 어릴 때는 휘황찬란한 꿈이 있었는데..... 현실은 가혹하기만 합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심할 때 우리는 종종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환상을 빚어내 스스로를 투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스타들의 삶과 일상에 그토록 집착하고 연예 뉴스란을 뺀질나게 드나드는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그들의 행동거지와 언행에 나를 투사하고, 결핍을 겨우 벌충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곤 혼자 상상하는 겁니다. 나도 빛나고 싶다. 이름을 남기고 싶다.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다. 평생 평범하게 살기보단 잠깐이나마 정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고.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위플래쉬》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위대한 드러머가 되려는 일념으로 가득 찬 주인공은 자신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일갈합니다. "사람들 기억에서 지워진 채 90살까지 사느니 서른넷에 술에 찌들고 파산해 죽더라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는 게 나아요."
이름을 남기고 불후의 명성으로 기억되리라는 강렬한 욕망. 아킬레우스가 트로이를 불태우게 만든 원인이며, 장군들을 전쟁터로, 탐험가를 미지의 정글로 끌어들인 그 무시무시한 용광로! 그것이 바로 명성의 위력입니다. 비록 악명으로 기억될지언정, 역사의 한 줄에 내 이름 남기고 가겠다는 그 강렬한 갈망을 잠재우지 못했던 사람들. 역사책은 그들의 이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경악하게 만드는 규모의 진시황의 병마용,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는 또 어떻고요.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물로 영생을 보장받으려던 노력의 산물이죠.
기원전 356년, 후대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명성을 떨치는 건축물인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불에 타 파괴되었습니다. 어느 고대의 시인은 이 신전을 다른 모든 불가사의들의 명성을 가릴 만큼 위대한 인간의 성취로 극찬했습니다. 근데 이 신전이 불타서 없어진 것입니다. 화재의 원인은 어처구니없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싶다는 욕망에 방화를 저지른 것이었죠. 그는 당당한 어투로 "악한 짓을 저질러서라도 역사에 영원히 내 이름을 남기려 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에페소스의 지도층은 그를 처형하고 그의 이름을 결코 남기지 못하도록 금지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청개구리 역사가들은 결국 그 당돌한 청년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헤로스트라투스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앞의 경우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름 한 줄 남기고픈 욕망은 다들 갖고 있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명성과 명예를 향한 우리의 갈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빌리자면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유전자가 살아남아야 한다. 뇌과학적으로 볼 때 이름을 남긴다는 행위는 뇌가 만들어낸 착시 현상이다. 즉, 내 이름이 남으면 내 유전자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진화적 착시 현상일 뿐이다'라고요. 인간은 자신이 종국에는 소멸할 존재라는 사실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공포와 허무를 이겨내려는 방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과학자들의 이런 설명은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이고 사후적 설명이라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를 '인정투쟁'의 일환으로 설명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헤겔이 설명했듯이 인간의 삶은 인정의 갈구를 통해 진행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타인의 시선을 통해 확인하려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죠. 우리가 하는 행동은 모두 타자를 염두에 두고 행해지며,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 인정투쟁에서 가장 완벽하게 승리했음을 방증하는 증거입니다. 주변 소수의 인정을 받아도 엄청난 성취일진대, 수백 수천만 명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죠. 단순한 유전적 생존을 넘어서 내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타인에게 증명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까요. 결국 우리가 연예인의 화려한 삶과 위인의 연대기에 매료되는 것은, 그들이 인정투쟁에서 승리한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평범하고 범속하게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쓰라린 진실을 오롯이 체화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평범함을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겠죠. 내가 잊힐 이름의 일원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여기서 홀가분함을 느끼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사실 후대에 이름을 남긴 사람 중에는 비참한 생애를 살았던 이도 많았습니다.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데 앞장섰던 아킬레우스는 젊은 나이에 때 이른 죽음을 맞습니다. 후일 오디세우스가 하데스에 도착해 아킬레우스의 영혼을 만납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오디세우스의 입을 막습니다. 그리곤 말합니다.
차라리 소작농으로 땅을 갈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의 종이 되어도
이승에서 살 수만 있다면 좋겠노라. 저승의 왕으로 군림하는 것보다.
(오디세이아 11권)
그는 살아생전에는 역사책에 지워지지 않을 업적을 남기고 영원히 기억되길 바랐지만, 정작 죽고 난 이후에는 범부의 신세로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즐기고 싶다고 토로합니다. 기실 명성과 명예란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서 불굴의 명성과 명예를 위해 전투에 나갈 것을 종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인공은 외칩니다. 명예를 가진 자가 누구냐고, 그 사람은 이미 전쟁터에서 죽었다고. 그는 결론짓습니다. "명예란 묘비에 새겨진 비문일 뿐"이라고요. 셰익스피어의 통찰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명성을 위해 필요 이상의 고통과 단명(短命)을 초래할 바에야 보잘것없는 나날을 영위하더라도 지상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다고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항상 있는 법이니까요.
원하던 회사 면접에는 탈락했습니다. 비루한 사회초년생의 현실에서 저는 아직도 명성과 명예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위에서 명성의 무용성을 설파했지만, 여전히 명사(名士)의 삶을 기대합니다. 오늘밤 꿈에서 저는 위대한 작가가 되어 연단에 서서 삶과 진리, 예술을 논할 것입니다. 짧은 꿈 속에서, 영원한 저의 우상 카뮈처럼 자랑스럽게 세계의 부조리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청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겠죠. 내 존재가 온 세계의 인정을 받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명예와 명성이 역사책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허상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덕분에 오늘밤 꿈자리는 꽤나 달콤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