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협상 타결에 덧붙임
* 독자 분들 중 종교를 가진 분들이 있을 수 있어서 노파심에 덧붙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성찰을 담은 것으로, 다양한 관점을 공유하고자 하는 목적의 글입니다.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전하였다.
"야훼께서 나를 보내시어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소. 그러니 이제 야훼의 말씀을 들으시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이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 사무엘상 15:1-3, 공동번역성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휴전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전해 들었습니다. 분노 탓에 일부러 관련 뉴스를 잘 안 보고 있던 터라 오랜만에 확인해 보니 현재까지 사망한 팔레스타인 사람은 46,8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1,500명이 전투원 사망자고 나머지는 어린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사망자입니다. 저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4.3 학살이 일어났을 때의 사망자가 3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게다가 4.3은 7년 동안 진행되었던 반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1년을 조금 넘게 이어진 것과 비교하면 그 참상을 더욱 실감 가능하죠. 이런 가공할 학살극이 벌어지는데, 국제사회가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점은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저는 위의 사진을 21세기의 가장 끔찍한 광경 중 하나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습니다. 작년 7월 24일, 네타냐후 총리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장면이죠. 저 시점에 이스라엘군은 이미 3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을 학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비극의 총책임자를 민주주의와 인권을 선도한다고 자랑하는 미국 의회 한복판에서 박수로 맞이하며 응원하는 광경이라니. 이보다 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은 없을 것입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주장하는 '규범에 의해 움직이는 국제질서'가 얼마나 공허한 말장난인지 폭로되었죠.
과연 정의는 실현될 수 있을까요? 국제사회는 네타냐후를 전범으로 역사의 법정에 세워 처벌할 힘이 있을까요? 아마 힘들 겁니다. 여전히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열렬히 아끼니까요. 지정학적 이익에 더해 강력한 유대계 로비에 정치적 선택이 좌우되는 현실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버릴리는 만무합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에 의해 직접 권좌에서 끌어내려지지 않는 이상 네타냐후는 계속 권력을 유지할 겁니다. 어쩌면 형사처벌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리며 침상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죠.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역사를 돌이켜볼 때 폭력으로 민중을 짓밟고 숱한 목숨을 유린한 권력자들이 처벌받은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요. 한 명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로 처벌이 가능합니다. 근데 만 명을 죽이면 처벌이 어렵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나카르시스는 말했습니다. '법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만 강한 거미줄과 같다'라고요. 아마 노자가 틀렸던 것 같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넓디넓어서 성긴 듯 보이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 - 天網恢恢 疎而不失)
몇 주 전에 교회 공동체에 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치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모임이었죠. 감사하게도 저를 초대해 주셔서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피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성경 말씀을 묵상하던 차에 한 분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참상을 언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봉쇄로 인해 굶주린 가자지구의 주민들이 식량 배급 트럭 앞에 몰렸다가 압사당한 일화였습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예사로 벌어지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시더군요. 아마 그분은 종교가 탄생한 이래 가장 까다로운 화두를 꺼낸 것일 겁니다. 바로 '신의 침묵'이죠. 전지전능전선한 신이 있다면 왜 지상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일까요? 그는 분명 정의의 수호자이자 억압받는 자들의 편이 아니었나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천재들이 매달렸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답변은 없습니다.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 보라,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 억압자들의 손에서 폭력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 코헬렛 4:1, 가톨릭 성서
스웨덴 출신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의 영화 <겨울빛(1963)>은 '신의 침묵'이라는 주제를 가장 집요하게 파헤친 작품일 겁니다. 주인공 토마스는 작은 시골 교회의 사제입니다. 얼마 전 자신의 아내와 사별하고 필사적으로 신앙에 매달리는 중이죠. 하지만 아무리 간구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습니다. 교회를 가득 메운 공기는 싸늘하기만 합니다. 의구심은 커져만 가죠. 사실 신은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던 중 요나스라는 인물이 찾아옵니다. 그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영적 조언을 듣고자 찾아온 그에게 토마스는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조물주는 없어. 생명의 주관자도 없어. 예정이라는 것도 없다네." 며칠 뒤 요나스는 자살합니다. 종교에 대한 열정은 예전 같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교회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는 아무도 오지 않는 교회에서 홀로 예배를 집전합니다. 적막에 찬 침엽수림만이 그의 곁에 있을 뿐입니다. 영화의 엔딩까지 어떤 구원의 징표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정적인 카메라는 개별자의 고독을 프레임 단위로 잡아냅니다. 결국 모든 해답은 침묵 뒤에 남겨집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는 야만이다"라고 어느 학자가 말했죠?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유대인 중에는 신에 대한 신앙을 잃고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수백만 명이 그토록 잔혹하게 학살을 당하는데 탄원이 전혀 하늘에 가닿지 않았기 때문이죠. 가스실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가 신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도 그중 일원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그는 전쟁이 끝난 이후 자신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기 위해 계속 글을 썼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 신이 죽었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이미 신은 죽은 상태였습니다. 계몽주의 이후 눈에 띄게 쇠약해지던 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은 니체였습니다. 니체 이후 격동의 20세기는 신의 부재를 더욱 강렬히 증언할 뿐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만들어 낸 강렬한 캐릭터 이반 카라마조프는 말합니다. 조물주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 어린아이가 찢겨 죽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그 세계를 거부하겠노라고. 아마 가자지구에 사는 어느 고독한 사색가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요. 알라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17,400명의 어린아이(https://www.aljazeera.com/news/longform/2024/11/20/an-a-z-of-the-children-israel-killed-in-gaza)가 죽어야 한다면 그따위 신앙은 믿지 않겠다고요.
애석하게도 저는 무신론자라 신의 섭리를 믿지 않습니다. 세상의 끝에 이르렀을 때 정의가 샘물처럼 흐르고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누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종말까지 결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요한의 묵시록 21:4, 공동번역성서) 천만에요.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과 고통, 소음과 분노는 멈추지 않고 늘 함께할 겁니다. 신이 주재하는 질서는 아마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도 자주 길을 잃고 헤매게 되겠죠.
그럼 너는 무엇을 믿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믿는다는 단어는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네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인간 공동의 노력과 분투만을 신뢰합니다. 정의와 선(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성한 무언가는 결코 아닐 겁니다. 정의는 인간들이 함께 모였을 때, 연대(solidarity)를 통한 노력에 의해 어설프게 실현 가능할 뿐입니다. 정의는 형이상학적이지 않습니다. 누더기로 기운 듯 너덜거리는 정의가 우리에게 남겨진 전부입니다. 신념에 따라 모인 오합지졸 공동체(community)가 이 불완전한 정의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이번 팔레스타인 학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협상이 타결되어 휴전 협정을 맺었으니 다행이지만 언제고 다시 불안정한 평화가 깨어질지 모릅니다. 살얼음판이지만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평화를 염원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국의 민중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애썼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뭐, 그 모든 고군분투의 배후에 신의 역사(役事)하심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거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더라도 지금 서로의 손을 맞잡은 주체는 인간입니다. 결함투성이에, 미워할 때도 있고 종종 함께 웃음 짓기도 하는 인간 말입니다. 희망은 이렇게 조금씩 전진하는 것이겠죠. 어설프더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