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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을 읽으면서 왈츠를 듣다

퇴근 후 소소한 행복

by 탱귤도령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 열린 창문(1921)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을 때는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번 이상은 꾸준히 쓰겠노라고 마음먹었지만, 자꾸만 글을 쓰기 힘들어지곤 합니다. 일상에서의 번잡한 사건들과 어지러운 내면, 나약한 의지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한 문장 써 내려가는 것도 버거워하는 저를 발견하게 되죠. 이런 저를 질타하게 되지만 어쩌겠습니까. 글을 쓰기 어려운데 뭐 별 수 있나요. 근데 오늘은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표현하라고, 뭐든 좋으니 말을 내뱉으라고 시끄럽게 닦달하네요.




무엇이 제 글태기를 깨 주었을까요. 오랜만에 손에 든 책의 탓인 듯합니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학문 세계를 탐구하는 책을 읽고 있는데, 매 호흡마다 독서를 멈추고 문장을 필사하느라 여념이 없게 되더군요. 라캉의 RSI 도식(상상계-상징계-실재계)이 우리 일상의 다양한 국면을 명료하게 포착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탁 치게 됐습니다. 특히 ‘주체 스스로의 좌표를 재설정하라’는 조언에서는, 심장 쪽에 쨍-한 울림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 저는 백상현 작가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라캉 철학을 명징한 언어로 쉽게 전달해 주는 글솜씨를 가진 분입니다! 필독을 권합니다)




퇴근 후에는 활자 읽기를 여간 꺼려하다 오랜만에 다시 웅숭깊은 사유의 세계에 흠뻑 빠진 탓인지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네요. 근데 고백하자면,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저는 영화 평론을 하려 했습니다. 라캉의 삼원 도식과 실존주의자들의 성찰을 한데 섞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해석해보려 했죠.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니, 생각을 정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더군요. 그 탓에 영화 평론은 잠시 미뤄두고, 이렇게 일상에 대한 단상을 적어봅니다. 뭐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습니다.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 음악 1 (1895)



의도하던 고급진(?) 글쓰기는 좌초되었지만, 전혀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지금이 사위가 조용하고 온전히 고독을 즐기고 있는 늦은 밤이라는 점과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선율의 왈츠곡이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뜬 플레이리스트인데요. 제목이 '들어본 적 없는 왈츠 모음집'이라네요. 나름 클래식에 잔뼈가 굵다고 자만해오던 터라 어디 한 번 들어볼까 하고 클릭했는데, 와! 진짜 처음 접하는 왈츠입니다. 무명 유튜버의 자작곡이거든요.



들어본 적 없는 왈츠에 머리를 까딱거리면서 글을 쓰고 있고, 라캉의 철학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면서 아마추어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내일 출근해야 하고, 쌓인 업무가 많고, 스트레스가 넘쳐남에도 살포시 웃음 짓게 되는 것은 아직 제 삶에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행운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우연찮게 생전 처음 듣는 왈츠를 찾게 된 것처럼 아직 즐거운 시간은 많이 남아있나 봅니다. 이제 금요일이네요. 주말엔 나들이를 가야겠어요. 날씨가 화창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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