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승화된 애도의 한 형식을 만나다
아득한 유년기의 어느 날, 친할아버지의 부음(訃音)이 들려왔다. 아직 한참 어리던 나는 죽음이라는 극한의 운명이 어떤 무게감을 지닌 것인지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온화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영정 사진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사진 속 할아버지의 표정은 걱정과 근심에서 초탈한 도인(道人)의 기운이 어려 있었다. 망자의 특권이란 게 여기에 있지 않을까. 숱한 쾌락과 고통을 초월해 저편의 세계로 영영 가버렸으니, 지상에 남은 사람들의 아우성에서 탈출했다는 것. 지상의 소란과 영영 이별이라는 쓸쓸한 평화.
친척 아저씨들은 카드놀이에 집중하며 소주와 담배를 입에 문 채 망자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난생처음 듣는 영웅담이 구전 동화인 양 나의 귓전을 때렸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후 견장을 달고 다시 돌아온 모습 혹은 수류탄을 맞고도 살아 돌아온 불굴의 생명력에 대한 찬탄. 나의 할아버지는 6.25 전쟁 참전용사였다. 20대 초반에 해병대로 자원입대하였고, 숱한 사선을 넘나들며 죽음과 유희하였다. 치열한 고지전에서 적군의 수류탄이 근처에서 터져 한쪽 다리에 파편상을 입고 죽는 순간까지 불편한 걸음걸이와 함께 지냈다.
할아버지가 왜 대검을 꽂고 참호로 돌격해 서로를 난자해 죽여야만 했던 처절한 전쟁터로 제 발로 들어가야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가혹한 운명의 함정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했다. 1940년대 후반, 제주 청년이라는 사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당신께서는 4.3이라는 역사의 파도에 휩쓸린 미약한 개인이었다. 그 살벌한 시절, 서북청년단과 경찰이 마을로 들어오면 시체와 불탄 가옥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내 할아버지는 산 위에서 망을 보며 마을 사람들에게 도망치라고 알리는 파수꾼 역할을 도맡았다. 학살의 광기가 잠잠해 갈 무렵, 전쟁이 터졌다. 빨갱이를 때려잡는 무리에 반해 마을 사람을 구하였으니,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자원입대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니요!’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절규의 표현이었다. 빨갱이 괴뢰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당신은 사자(使者)와 씨름하며 3년을 보내야 했다. 흙탕물 가득 찬 참호에서 전우의 시체와 동고동락하는 나날의 반복.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버텼을지 그 어린 시절에도 난 결코 상상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며칠 뒤, 무당들이 찾아와 긴 굿판을 벌였다. 너무 오래전이라 상세한 세부사항이 어렴풋하지만 나에게 굉장한 인상을 준 것만은 확실하다. 형형색색 옷을 입고 온 무당이 한 손에 방울을 들고, 또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저런 도구들을 들고 열심히 춤을 추던 장면이 재생된다. 나는 신기한 모습에 그저 입이 떡 벌어져 구경하고 있었고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어머니는 시종일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싫은 티를 팍팍 내시던 게 기억에 남는다. (어쩔 수 없다 성경에 대놓고 샤먼은 죽여버려야 한다는 극언이 담겨있으니까)
아무튼 무당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데, 섬뜩하면서도 동시에 처연한 슬픔의 정조를 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발을 디딘 장소가 어떤 역사를 담고 있는지 그 내력을 길게 읊었다. 그는 수백 년의 세월을 넘나들며 한 많은 인생을 살았던 인간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기는 어느 여인이 목매달아 죽었으며 어쩌고 저쩌고.....' '저기 누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 그의 입을 통해 이 땅을 밟고 살다 스러져갔던 수많은 인생들이 저마다의 한(恨)을 노래하는데, 어린 나이에도 닭살이 돋으며 소름이 끼치고, 눈물이 흘렀다. 내가 그때 왜 눈물을 흘렸을까. 에헤라디야 가락진 노래에 담겨 있던, 고생만 하다 죽어갔던 선조들의 고달픈 삶들이 응축되어 내 어린 감수성을 관통해 들어왔기 때문이었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 굿이야말로 가장 예술적인 애도의 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자문한다.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거품처럼 사라져 간 사람들. 그들의 말하지 못한 기구한 사연들을 음악의 거죽을 통해 전달해 주는 굿이라는 행위에는 그저 미신이니 이교도니 함부로 낙인을 찍을 수 없는 깊은 층위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애도에 대해 정말 다양한 학자와 작가들이 책을 썼지만, 그들의 작품보다 더 나의 뇌리에 뿌리 박힌 건 어린 시절 내 앞에서 격렬하게 울부짖던 무당의 진혼곡이었다. 살과 뼈가 떨리던 그의 노래를 잊을 수 없다. 나는 그가 우리 할아버지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 것이 참 고맙다. 야만의 세월을 통과하며 삶을 버텨나가야 했던 할아버지의 곡절 많던 인생을 보듬어 안아준 것이다.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며칠 전, 4.3 학살의 주요 사적지 중 한 곳인 주정공장 터에서 굿판이 열렸다. 우리의 기억 저편 망각의 바다에 이름 없이 가라앉아 있는 이들을 다시금 끌어올려 이름을 부여하는 일. 단순히 역사가만이 그 일을 전유할 수는 없다. 억압과 폭력으로 희생당한 자들, 인생이라는 무망한 바다에서 몸부림치다 쓰러진 그 숱한 영령들의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주고 위로해 주는 자들. 그 일을 해주는 무당들이 아직 남아있어 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4.3도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들을 떠올리며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