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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남루함을 어찌할 것인가

범속한 삶의 한 초상

by 탱귤도령




1416230653.6181_117_o.jpg 공간적 개념, 기다림(Concetto spaziale, Attese, 1967) -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




잠시 여유가 생길 때마다 가까운 도서관에 들른다. 책들이 빼곡히 진열된 서가를 보노라면 괜스레 마음 한 구석이 후덕해지는 착각에 빠진다. 지금 내 앞에는 수천 년 인간 문명이 낳은 가장 치열한 사유와 지식들이 다소곳이 놓여있는 것이다. 철학책 한 권을 집어 들고 그 속에 빠져든다. 인간 이성의 정점을 탐험하고 있다는 기분에 전신이 만족감으로 감싸인다. 사회 구조를 낱낱이 해부하고 통렬하게 비판하는 사회과학 책을 읽으며, 신자유주의의 분열 통치 전략을 명확히 드러내는 문장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포스트 맑시스트들의 신(新) 공산당 선언에 전율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나 출근의 아침이 밝고, 일터에 복귀하는 순간 나는 다른 자아를 갈아입는다. 허리는 바닥을 향해 굽고, 고개는 주억거리며 조아리기 바쁘다. 상사의 불호령은 마치 파괴의 신이 내뿜는 사자후처럼 들린다. 행여나 인사고과에 흠집이 날까 두려워하며 하루를 견딘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언어폭력과 무례함의 경계를 넘나 든다. 괜히 다른 이의 흉을 보고, 나는 그보다는 낫다는 알량한 자기 위안을 일삼는다.


분명히 두꺼운 책을 읽고, 고급(?) 예술을 즐길 때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유목민이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작달막한 회사, 지역사회를 넘어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사유하고, 우주의 경계 너머 형이상학적인 차원까지 넘나들었는데..... 그런데 현실은 왜 이리도 비루한가. 밥벌이라는 삶의 활동이 고상하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질척이고 남루할 필요가 있는 걸까.



thenewyorker_movie-of-the-week-faust.jpg 영화 <파우스트(1926)>의 한 장면 - F.W 무르나우 감독



몇 달 전, 나는 파우스트적 고뇌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파우스트 박사는 일평생을 바쳐 학문에 정진했고, 당시 존재하던 모든 지식을 섭렵했지만 종국에 마주하게 된 것은 자신의 하잘것없는 실존이었다. 그는 절규한다.


"나는 신들을 닮지 않았다! 오히려 벌레와 닮았다. 어디서나 인간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 어쩌다 하나쯤은 재수 좋은 놈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을 알려고 수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파우스트의 처절한 물음에 애써 답변을 했다. 그럼에도 책과 예술은 중요하다고. 이 부박한 세상살이 속,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 한켠의 평화만으로도 삶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때는 그 나름의 확신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의구심은 깊어져 간다. 카프카는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쳐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나 역시 자문한다. 내가 읽은 그 많은 책이 과연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그렇노라고 당당히 답할 자신이 없다. 오히려 자괴감과 우울함만 더해진 것은 아닐까. 지식이 많으면 근심이 많은 법(전도서 1:18)이라 했다. 책에서 얻은 이론적 지식이 실제 삶에서의 실천적 지식으로 변모되지 않는 것을 자각할 때 입 안에 씁쓸한 뒷맛이 감돌곤 한다.



Rembrandt_-_The_Flayed_Ox_-_WGA19252.jpg 도살된 소(Slaughtered Ox, 1655) -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나의 자괴감을 결정적으로 마주한 일이 최근 있었다. 회사에 새로 입사하신 분은 채식주의자셨다. 깊이 있는 학문적 사유를 바탕으로 삶에서 철저한 실천을 이어가고 계셨다. 회식 날, 지글지글 익어가는 누리끼리한 고기 한 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문득 손이 멈췄다. 그분은 웃으며 괜찮다고, 편히 드시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도저히 젓가락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안의 부끄러움이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공장식 축산에 희생되는 동물들의 참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피터 싱어, 마사 누스바움 등 동물권과 종차별에 목소리를 높이는 학자들의 글도 읽었다. 내 혓바닥의 쾌락과 동물들에게 행해지는 그 가공할 폭력을 저울질했을 때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도 명쾌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고기를 씹는다. 채식주의자로 살면서 겪을 그 끊임없는 해명의 순간들을 견뎌낼 용기가 없었으니까.


지혜롭고, 윤리적이며 사려 깊은 인간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책과 예술을 열심히 애호했지만, 결국 마주하게 된 건 옹졸한 소시민적 자아의 한 초상이다. 자신감을 잃고 푹 수그린 고개와 떨궈진 어깨. 세상을 직시할 용기가 없어 애써 감은 눈. 명료한 인식은커녕, 안개 낀 머릿속은 술에 취한 듯 몽롱할 따름이다. 불현듯 노자의 글귀가 떠오른다.


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기만 하다.
세상 사람들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다.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세상 사람들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하다.

-『도덕경』 20장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의 한없는 낙차를 여실히 느끼던 중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이 모순적 상태조차도 인간의 한 조건이 아닐까. 인간은 통일된 존재이자 주체일 수 없고, 언제나 분열된 자아를 살아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책과 예술이 진리를 사유케 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책을 통해 인간 조건의 민낯을 한층 적나라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삶의 비루함과 남루함, 허무함, 부박하고 지질한 현실을 명료하게 파악하게 해 준 것은 책과 예술이 나에게 선사한 선물이다. 이걸 선물이라고 불러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삶의 초라함을 깨닫는 일조차 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법이다.



french-philosopher-jean-paul-sartre-542248784-5a7dc6728e1b6e0037c1281b.jpg 서재에서 작업에 몰두 중인 사르트르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서전 『말(Les Mots)』에서 자신을 "한 장의 잘못된 승차권을 쥐고,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에 비유한다. 자신은 그저 잘못된 기차에 탄 환영받지 못하는, 아무런 정당성 없이 앉아 있는 승객에 불과하다는 고백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시작된 끝없는 독서와 예술적 여정의 최종 결론은, 개인적 존재의 무의미함과 우연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의 소설 『구토(La Nausée)』에 등장하는 주인공 로캉탱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필연성 없이 주어진 잉여물이며 무(無)에 가깝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구토를 느낀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조차 거추장스럽고 귀찮게 느껴지는 한 더미의 실존자들이다.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있을 손톱만큼의 이유도 없다. 우리들 모든 실존자들은 혼란스럽고 막연하게 불안감을 느끼며 다른 실존자들에 대해 자신이 잉여물임을 느낀다. 저 나무들, 철책문, 조약돌들 사이에 내가 성립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관계는 「잉여적」이라는 것이었다. […] 저기 내 앞에, 약간 왼쪽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도 잉여물이다. […] 그런데 나른하고, 축 늘어져 있고, 외설스럽고, 음식물이나 소화시키고 있고, 우울한 생각이나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는 나는, 나 역시 잉여물이었다. - 사르트르 『구토』中



BACON-SELF-1332x1536.jpg 자화상(Self-Portrait, 1969)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미국의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삶을 바라보는 1인칭적 관점과 3인칭적 관점의 괴리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1인칭 자아의 관점에서는 모두 소중하고 절박한 일들의 연속이지만, 3인칭적, 곧 우주적 관점에서는 헛되고 먼지처럼 가볍다. 엄밀히 따져볼까? 어떤 이에게 죽음도 불사할 만큼 중요한 목표와 가치가 있다고 해보자. (계급철폐 혁명 혹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등등.....) 그가 아무리 자신의 목표와 가치를 정당화하려 해도, 우리는 결국 무한퇴행의 덫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천진한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빠, 그 일은 왜 중요해요?”

“음, 그건 이러이러해서 중요하단다.”

“그럼 그건 왜 중요한데요?”

“그건 또 이러저러해서 중요하지.”

“그 이러저러한 건 또 왜 중요해요?”

“아들아, 밥 다 먹었으면 얼른 자는 게 좋지 않겠니?"


이렇듯 모든 정당화가 결국 불가해한 '답 없음'으로 이어지는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러니한 웃음으로 대응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머를 환영하듯이 이 불일치를 환영할 수 있으며, 이 불일치는 달콤쌉싸름한 맛을 띤다. 눈물과 분노가 아닌 체념의 정조를 띤 지친 미소를 머금고 살아갈 수가 있다. 이 우주와 인생이라는 거대한 농담 따먹기에 절로 쓰디쓴 웃음이 난다.


이제는 책과 예술, 학문에 대한 집착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차피 우주적 스케일에서는 모든 것이 무(無)에 가까운 일일진대, 굳이 유용성을 따지고, 실천하지 못했다며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책이 없었다면 이런 어설픈 사유조차 불가능했을 테니. 나는 내가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안다. 그래서 오히려 짐을 덜어낸 듯한 해방감을 느낀다. 학문이여, 예술이여, 고맙다. 그대들 덕분에 나는 내 비루함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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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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