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를 품기에 충분한 세계
늦은 저녁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던 어느 날. 미약한 가로등 불빛 아래 좁은 길목에 고양이 몇 마리가 오손도손 모여 조촐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길이 워낙 좁은 터라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고 조심히 지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의 눈에 나는 그저 고약한 포식자로 비쳤을지 모른다. 고양이들은 쌩하니 도망쳐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숨어 버렸다. 초라한 고기 한 점만이, 덩그러니 내 발치에 애처롭게 놓여 있었다. 마음 한편에 미안함이 감돌았다. 그냥 멀찍이 돌아갈 걸 그랬나, 후회도 되고...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 풍경이지만, 나는 문득 동물과 생명에 대한 나의 태도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생명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 것인가. 어떻게 존중해야 할 것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나 나의 짧고 부족한 사유를 걸쳐 조심스럽게 선언 하나를 내보이고 싶다. 인류 문명이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사유의 집적물은 결국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 "생명은 존귀하다. 그들을 존중하라."
서구 관념사를 지배해 온 유대-기독교 전통과 이슬람교를 아우르는 아브라함계 일신교는 생명에 어떤 윤리적 지위를 부여할까? 창세기의 구절을 떠올려 보자. 땅과 바다, 하늘을 부유하는 뭇 생명을 창조한 뒤, 신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창조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그것은 결코 착취를 허용하는 백지 수표가 아니다. 그것은 돌봄의 책임, 청지기의 직분이었다.
신학자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는 말한다. 우주는 인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며, 동물에게 해를 가하는 일은 곧 하느님께 해를 가하는 것과 같다고. 꾸란은 "땅 위의 어떤 동물도, 날개로 나는 어떤 새도, 그들은 너희와 같은 공동체이다" (꾸란 6:38)라고 명시하면서 인간이 동물의 권익을 위해 적극적인 보호와 자비를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아브라함 일신교적 동물 보호의 특징은 인간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다른 생명을 '굽어살필' 의무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아브라함 일신교 생명 윤리의 한계점이 드러나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도 아대륙의 사상은 어떤가.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는 모두 비폭력(아힘사)의 윤리를 중심축에 두며, 모든 생명과의 깊은 연관성과 존엄을 설파한다. 힌두 철학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아트만, 즉 신적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바가바타 푸라나』(7.14.9)는 동물을 "자신의 자녀처럼" 여기라고 조언하고, 『비슈누 다르마 수트라』(51.69)는 모든 존재의 안녕을 바라고 살생이나 고통을 주지 않는 자는 영원한 기쁨에 이른다고 전한다.
불교 경전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인드라망의 비유는 불교의 연기(緣起) 법칙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예로서, 모든 현상이 상호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라고 가르친다. 거미줄처럼 얽힌 인드라의 보석들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를 비추며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고양이, 나무, 인간, 물살이, 이름 모를 벌레조차 예외가 없다. 이는 존재의 수레바퀴 안에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상호 연결성을 포함한다.
인도의 현자들이 생명 존중 사상의 고갱이로 가장 확고하게 내놓은 견해는 바로 삼사라(윤회) 개념일 것이다. 윤회 교리는 영혼이 다양한 생명 형태로 환생할 수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든다. 이는 동물이 과거 생에 인간이었을 수도 있고, 인간이 미래 생에 동물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보다 고정된 인간-동물 위계질서를 가진 전통들과 달리, 윤회 개념은 유동적인 경계를 창출하며, 이는 동물들이 본질적으로 카르마(業) 여정의 동반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연민과 존중을 확장하는 강력한 이념적 기반이 된다. 윤회 사상이 생명 존중의 결론을 이끌어낸 것은 인도와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그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회 사상을 주장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저서 『카타르모이』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나는 이미 한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고,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말 못 하는 물살이였으니. (...) 슬프다! 입술로 살코기를 먹는 끔찍한 일을 내가 꾀하기 전에 왜 일찍이 비정한 죽음의 날이 나를 파멸시키지 않았던가."
고대의 영성만이 생명의 길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세계상도 생명에 대한 우애를 일깨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후(1859), 진화론은 이미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었다. 모든 생명은 40억 년 전 바다 깊은 열수구에서 전기화학적 작용을 통해 탄생했고, 그 최초의 생명이 끝없이 갈라지고 진화해 가며 생성되었다고. 창공을 나는 새부터, 나를 향해 꼬리를 살랑거리며 달려오는 강아지와 비좁은 축사에 갇힌 닭,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열대의 파인애플까지 - 모든 생명은 같은 조상을 공유하는 형제라고. 이는 형제애적인 관점에서 모든 생명을 사유하고 헤아려야 할 깊은 윤리적 당위성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형제를 함부로 해하면 되겠는가? 인간은 언제까지 카인의 길을 걸을 것인가.
테렌스 맬릭의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Tree of Life, 2011)》에는 뭇 생명의 나약함, 그리고 이에 연유하여 발현되는 자비심(karuṇā)을 사유하게끔 만드는 장면이 짧게 스쳐 지나간다. 양치류 잎사귀가 그득한 강가에 작은 공룡 한 마리가 상처 입은 채 누워있다. 수각류 육식공룡 한 마리가 그에게 다가간다. 연약한 생명의 끈을 완전히 끊어버릴 심산으로, 억센 발을 들어 머리를 짓밟으려고 한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포식자 공룡의 움직임이 일순 멈춘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등을 돌려 저 멀리 강 둔치로 물러난다.
양심 혹은 공감 능력이 탄생한 진화적 순간이다. 쓰러진 공룡의 눈을 바라보던 포식자는 고통을 어렴풋이 인지한다. 그 순간, 먹잇감이나 경쟁자가 아닌 고통받는 '타자'의 인식이 일어난다. 원초적인 공감의 순간이 포식자의 잔인함을 멈추게 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행동을 멈추게 만든다. 이 인상적인 장면은 이후 영화가 진행되며 나오는 주인공 형제의 어린 시절, 동물과 다른 친구들에게 잔인하게 굴다 문득 멈칫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모습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일견 난해한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바는 간단하다. '생명의 길'을 북돋는 삶을 살라는 것!
애석하지만 생명의 길은 너무 자주 짓밟히고 무너진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어느 축사에서 암소는 머리에 가스총을 맞고 쓰러질 것이며 닭은 뜨거운 물에 익사할 것이다. 진흙탕 참호 속에서 어느 무명의 병사는 꺼져가는 마지막 숨을 가쁘게 들이쉬고 있으리라. 어딜 가나 피를 내뿜으며 죽어가는 생명들이 가득하고 그 와중에도 세계는 움직이고, 강은 도도히 제 방향으로 흘러가며, 비치 보이스와 비틀즈의 음악은 축음기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온다. 파괴와 억압의 길을 걷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도 생명의 길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주저하고, 저항하지 않는 스스로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태고 이래 계속되어 온 파괴와 폭력의 노선에 침묵하지 않는,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는 존재로 언제쯤 거듭날 수 있으려나.
로렌스 스턴의 소설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1759)>의 구절로 이 성긴 글을 끝내고 싶다. 주인공 트리스트럼 섄디의 삼촌 토비(Uncle Toby)는 자신의 방 안에서 파리 한 마리를 잡았다가 손에서 놓아주며 말한다.
“Go, poor devil, get thee gone, why should I hurt thee?—
This world surely is wide enough to hold both thee and me.”
가거라, 가엾은 녀석아. 왜 내가 너를 해쳐야 하겠는가?
이 세상은 분명히 너와 나 둘 다 품을 만큼 넓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분명히 더 많은 토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