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하되
올해 초의 일이다. 복작거리는 출근 버스, 겨우 자리가 나자 재빨리 앉아 숨을 고르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꺼풀을 열어보니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여성분이 시야에 잡혔다. 부끄러움이 밀려와 얼굴이 붉어졌고, 서둘러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여성 분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갓 돌이 지났을까, 올망졸망한 몸뚱어리의 아이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이는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를 쳐다보았고, 서로의 눈이 일순 마주쳤다. 별빛을 담은 듯 맑고 투명한 눈망울. 아이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듯 나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태초의 언어로 교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 한마디 없더라도, 눈으로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저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잠깐동안 생각했다. 담뿍 쏟아져내리는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세상의 모습에 더없는 신비함을 느낄까? 흐드러지게 넘쳐흐르는 환상으로 가득할 아이의 머릿속은 어떤 색채를 띨까. 버스에서 내린 뒤, 아이의 눈빛을 곱씹으며 천천히 걸었다. 황갈색이 미묘하게 섞인 검은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땠을까. 피로에 절은 무서운 얼굴의 아저씨로 비치지 않을까 사뭇 걱정도 되었다. 저 아이의 눈을 스쳐갈 인연과 생(生)의 사건은 그에게 어떤 지울 수 없는 의미로 각인될 것인가..... 문득, 오래전에 읽은 한 시가 아이의 눈빛과 겹쳐졌다.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어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을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
- 최승자, 「20년 후, 지芝에게」
최승자 시인은 자신의 어린 조카에게 성장하며 마주할 삶의 아름다움과 위태로움에 대해 조용히 말을 건넨다. 시인은 아이의 눈을 망연히 쳐다본다. 가혹하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연약하고도 위태로운 삶과 세계의 현실을 속삭이듯 전한다. 그의 시는 삶이라는 애처로운 활동을 향한 찬가(讚歌)로 느껴진다.
살아있는 건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며,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올 것이고, 새로운 눈을 달게 된 후 두렵더라도 세상의 현실로 출근하게 되리라는 시인의 말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했던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수태 그리고 탄생, 유년기-성년기를 거쳐가는 삶의 궤적 한복판에 놓인 우리들은 치이고 아프고 고단하다. 기실 태어나던 순간부터 우리는 좁달막한 통로를 힘써 빠져나와야 했고, 돌연 처음 마주한 주위의 세상이 무서워 우렁찬 울음부터 터뜨려야 했다.
나는 안다 팔다리 달린 몸들
그 몸들이 얼마나 뜨거운가
그 끓어오르는 몸속에
얼마나 많은 울음이 들어 있는가를
갓난 것들은 태어나자마자
몸에서 울음부터 꺼내야만 하고
평생 동안 부지런히 지껄여
말들을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 김기택, 「뱀」中
김기택 시인은 보다 냉정한 어조로 생의 조건을 진단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몸에서 울음부터 토해내야 하고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부단히 지껄여 가며 무의미하고, 가볍고 경박한 말을 내뱉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탄생은 삶이라는 이름의 감옥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 태초의 함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온한 일자(一者)에서 쫓겨나, 소란스러운 개별성의 세계로 던져진 긴 유배. 삶이란, 한번 태어나면 몸뚱어리가 쇠락하여 그 기능을 잃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아파하고 번민하다 잿더미로 화할 숙명을 마주하는 처연한 과정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옛날 선각자들은 아래처럼 슬픈 어조로 되뇌었다.
난다(붓다 이복동생), 나는 새로운 존재의 생산을 아주 조금도, 그리고 단 한순간도 예찬하지 않는다 (...) 출생을 이루는 그 무엇이든, 즉 물질의 발생, 존속, 성장, 출현, 감정의 발생, 개념화, 영향력, 의식 이 모든 것은 고통이다. (...) 그러므로 난다, 어미의 자궁 안에서 존재를 바라는 자가 흡족해할 게 무엇이던가?
- 『불설입태경금석(佛說入胎經今釋)』中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하던 그 밤도 사라져 버려라.
그날이여, 어둠에 뒤덮여 위에서 하느님이 찾지도 않고 아예 동트지도 마라.
내가 어찌하여 모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으며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는가?
- 욥기 3장 3~13절 中 (공동번역성서)
그러나 굳이 탄생과 삶을 우울한 현자들처럼 눈물로써 바라봐야 할까 의문도 든다. 이미 태어난 이상 최대한 버텨가며 살아가는 것 외에 어떤 방도가 있을까. 삶과 죽음, 탄생과 임종이라는 거대한 드라마를 일관되게 찬양하거나, 애도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불가지론적 관점에서 삶을 바라볼 뿐이다. 삶이 단 한 번 주어진 축복이자 선물일지, 비탄의 계곡으로의 추방일지 쉽게 결론 내리지 않으리라. 다만 살아갈 뿐이다.
최승자 시인이 이미 자신의 시를 통해 유려하게 풀어내었기에 굳이 말을 덧붙이는 것이 염려되지만, 괜스레 버스에서 마주한 그 아이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어 짧게만 적는다.
네가 조우하게 될 세상에서 만날 뭇 생명과 함께 춤추듯 노닐기를 빈다.
부디 벽에 부딪혀 깨어지지 않기를,
세상이 부과한 단단한 편견의 무게에 짓눌리지 말아주었으면.......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있을 수많은 이름 모를 존재들의 눈(眼)에 눈물이 적게 맺히기를 바랄 뿐이다.
샨티, 샨티, 샨티 (Shantih, Shantih, Shanti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