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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닿을 수 없는 '너'라는 우주

결코 이해되지 못하는 우리, 그럼에도 나아가리

by 탱귤도령




room-in-new-york.jpg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 뉴욕의 방 (Room in New York,1932)




사춘기 시절의 기억이다. 온 가족이 고향 땅을 벗어나 강원도 기찻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가족 전체가 다른 지방으로 떠나는지라 마음도 괜스레 설레고, 기대도 충만했다. 여행 이틀 차였던 것으로 회상이 된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순간이었다. 옆에서 친형과 동생이 재잘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나는 객실 밖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나와 동일하게 창 밖 풍경을 주시하던 어머니의 옆모습이 갑작스레 생경하게 다가왔다. 매일 함께 하루를 보내던 '부모'라는 존재. 결코 그 실존을 의심조차 해본 적 없던 어머니가 전혀 낯선, 불가해한 '타인'으로 나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나는 당혹감에 휩싸인 채, 속으로 불안감을 잠재우려 애썼다. 그러나 이 '기분'은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시시콜콜한 인생사나 개인적인 습관, 일상의 자잘한 모습을 알고 있긴 했으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벗어난 '있는 그대로' 존재의 핵심에는 여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짧은 당혹의 순간의 끝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는 타인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타인이다. 나는 어느 누구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고.


아버지가 신춘문예 등단에 실패한 시인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또다시 당연스레 잘 안다고 믿었던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낡은 사진첩 속 빛바랜 사진에 각인된, 문학과 지성사 시집에 한껏 집중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그 낯선 이질감. 당신은 살면서 어떤 두꺼운 책도 읽어보지 않았고, 문학적 관심, 예술적 재능도 없었다고 손사래를 치던 그 모습. 그렇게 아무렇지 않았던 양 지나간 세월을 묻어두기까지 얼마나 많은 슬픔과 고뇌, 자책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을까. 차마 글로 쓰지 못한 그 욕망과 후회의 순간들.....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날,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안아드렸다. 맥락 없는 행동에 당황하는 부모님들의 얼굴 너머로도 나는 여전히 타자의 실루엣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닿을 수 없는 당신들에게




얼마 전, 음악 한 곡조를 듣다가 눈물을 흘렸다. 글렌 밀러의 <Moonlight Serenade>였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에 발매된 곡이다. 달빛에 취한 듯 아련한 화음과 선율에 집중하던 중 이미 죽어 없어진, 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한 사람들에 생각이 미쳤다. 글렌 밀러는 1944년 말, 영국해협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이외에 세션 연주를 했을 반주자들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일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벅차오르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의 염원과 사랑, 못다 한 말들, 이해받지 못한 진심들에 목이 메었다. 그들이 끝내 풀어내지 못했을 저마다의 이야기가 영원한 망각의 베일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슬퍼 나는 조용히 울었다. 수십 년 전에 사라진 사람들의 곡절이 애달파 눈가를 훔쳤다. 그들이 누구에게도 진실되게 이해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으리라는 사실이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전도서 1:8) 더듬더듬 진심을 전하려 해도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보잘것없는 말만 내뱉던 과거사를 복기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그들도 나에게 이해되지 못했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SF 소설 『솔라리스』에 등장하는 혹성의 바다가 떠오른다. 스스로 의식(意識)을 갖고 있는 생명체인 솔라리스의 바다에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달라붙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바다의 심층에 근접하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탄식한다. 진정한 소통과 이해는 좌초되었다고 말이다. 나에게는 기실 인간 개개인이 각각 솔라리스의 바다처럼 느껴진다.




N03174_10.jpg 그웬 존 (Gwen John) - 책 읽는 여인 (A Lady Reading, 1909-11)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가장 첨예한 보고서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등대는 다가갈 수 없는 타자성의 상징이며, 끝내 우리는 서로의 내면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각자의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 가족으로 묶여 있지만, 각자의 의식의 흐름 속에 고립되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가족의 중심인 램지 부인은 모두에게 사랑받지만, 그녀의 진정한 내면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또 램지 부인은 자신의 남편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위로를 말로는 전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의식은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표류한다. 울프의 소설에서 대화는 종종 피상적이다. A라는 말이 오가지만, 인물들의 머릿속에서는 A와 전혀 상관없는 과거의 기억, 불안, 감각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라는 한마디 뒤에, 누군가는 10년 전 비 오던 날의 실연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내일 있을 병원 검사를 걱정한다. 우리의 의식은 내면에서 흐르는 거대한 강물 그 자체이며, 우리는 그 강물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언어라는 조각배에 실어 간신히 타자에게 보낼 따름이다. 나는 사도 바울로가 자신의 서간에 적은 글귀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靈)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그 사람을 알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2:11)





이해할 수 없기에, 사랑한다




4194.jpg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 대성당(the cathedral, 1908)



인간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며, 가장 친밀하다고 믿는 관계조차도 타자성의 장막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자각. 니체가 말했듯이 디오니소스적 일자(一者)의 세계에서 아폴론적 분열의 세계로 추방된 우리에게 진실된 합일은 실현될 수 없으리라는 통렬한 고백. 그런데 어쩌면, 이 '이해 불가능성', '합일의 불가능성' 자체가 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badiou.jpg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완전한 이해나 감정의 일치가 아닌 차이를 견디며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나'와 '너'라는 두 개의 우주가 충돌하며 완전히 새로운 제3의 우주('우리')를 함께 건설해 나가는 고된 프로젝트와 같다. 사랑은 불현듯 들이닥치는 ‘사건’이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한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나의 관점이 아니라 둘의 관점에서 세계를 살아가는 실천이 시작된다는 것! 그는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그 비극적인 한계가 바로 사랑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메울 수 없는 나와 타자의 틈과 거리, 불투명함은 사랑이 지속되고 실현되는 조건 그 자체이다. 닿을 수 없다는 현실에 우리는 도망치거나 체념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매일 다시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일이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나는 그의 견해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슬픈 자각이 사랑이 시작되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당신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함께 이 세계를 바라보겠다는 결정. 사랑은 나와 다른 너를 향해 매일 조금씩 다가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너를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너를 사랑한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진짜 사랑은 불가능성의 벽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결단이자 용기이다.



the-lovers-2.jpg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 연인들 (The Lovers, 1928)


사랑은 소통 불가능한 각각의 소우주들이 서로의 고유한 우주를 향해 걸어가는 여정 그 자체일 것이다. 완전한 이해도, 온전한 침투도, 절대적인 공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의 선택과 헌신으로 "그래도 내가 너와 함께 걷겠다"라고 말하는 것. 그대와 더듬거리는 어투로라도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결단. 이게 인간에게 남겨진 참된 '함께함'의 방법론이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에도 찰나의 순간, 온전한 통역과 교감이 성취되는 대목이 있다. 램지 부인은 남편에게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남편은 램지 부인의 은은한 미소 속에서 사랑의 임재를 느낀다. 작중 등장인물인 릴리 역시 마지막까지 타인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예술작품을 완성하고, 이에 기대어 더듬거리며 타자와 소통한다.


나는 결코 당신을 이해할 수 없고, 당신의 광막한 의식과 기억의 조각 중 일부분만을 붙잡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내게 허락되는 한 당신을 최대한 이해하려 애쓸 것이다. 허망한 동일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균열과 간극 위에서 유희하리라. 내가 살아가며 마주할 모든 이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끝내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당신들을 껴안고 토닥여줄 허약한 팔뚝이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 항상 나에게는 당신들을 품어줄 여분의 몸뚱어리가 마련되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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