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역사: 기묘한, 거대한, 우연한 농담

역사 공부는 근본주의, 아집, 고집의 해독제(解毒劑)다

by 탱귤도령

단 한 번의 전투가 2000년 역사를 바꾸다



1280px-Battle_of_the_Milvian_Bridge_by_Giulio_Romano,_1520-24.jpg 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1520–24) by Giulio Romano


312년 10월 중순 로마(Rome),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앞두고 긴장감이 맴돌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293년 제국을 동서로 분할한 이후 서방과 동방의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쟁투를 거듭해 왔죠.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수년간의 내전을 통해 다른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제국은 '갈리아(프랑스)·브리타니아(영국)·히스파니아(스페인)'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와 '이탈리아·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막센티우스라는 두 개의 거대한 세력으로 양분되었습니다. 로마의 진정한 패권을 두고 두 라이벌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최후의 결전이 불가피해졌죠.


312년 10월 27일 밤, 두 '신(神)'이 충돌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신을 숭배하던 전형적 로마인이었습니다. 전투를 앞두고 그는 로마의 예언서인 '시빌라 신탁집(Sibylline Books)'을 펼쳤습니다. 신탁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10월 28일, 로마의 적이 멸망할 것이다." 막센티우스는 환호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한 자신이 '진짜 로마'이고,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에서 온 침략자이니 당연히 로마의 적=콘스탄티누스였죠.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절박했습니다. 그는 로마 외곽에서 도시를 포위한 상태였지만, 병력은 막센티우스보다 열세였죠. 그는 어떤 신에게 빌어야 할지 갈팡질팡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믿던 'Sol Invictus(무적의 태양신)'을 섬겼지만, 동시에 어머니가 믿던 기독교에도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1370px-La_Vision_de_Constantin_(phbw15_0208).jpg La vision de Constantin by Jacob Punel


전승에 따르자면 바로 그날 저녁, 그는 하늘에서 '키-로(Chi-Rho) 십자가(XP)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 징표로 승리하리라(In Hoc Signo Vinces)"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목소리도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정말 야훼의 계시였는지, 아니면 극도의 스트레스가 만든 환각이었는지, 고도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콘스탄티누스는 이 '우연한' 환시에 모든 운명을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즉시 병사들의 방패에 이 생소하고 기묘한 기독교의 상징을 그리도록 명령했습니다.


다음날, 막센티우스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우렐리우스 성벽 밖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오는 선택을 합니다. 전날 밤에 받은 신탁에 어깨가 으쓱해진 탓이었을까요. 그의 이 즉흥적 결정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습니다. 두 군대는 로마 외곽, 테베레 강의 밀비우스 다리를 끼고 격돌합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키-로 방패를 앞세우고 맹렬히 진군했고,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막센티우스의 병사들은 테베레 강물에서 대거 익사했고, 막센티우스 본인도 화려한 갑옷과 함께 강물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밀비우스 다리 전투' (312년 10월 28일)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패자가 되었고 그 이후 기독교는 로마의 합법적 종교로 공인됩니다.


미트라.jpg 황소를 제압하는 미트라


만약에(if)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에게 패배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역사학자들은 만약에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한 번 가정을 해봅시다. 막센티우스는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에 경도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승리했더라면 기독교는 제국 내 수많은 종교 신앙 중 하나로 남았다가, 역사의 뒤안길 너머 사라진 그 숱한 고대의 종교들처럼 망각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어쩌면 당시 로마제국에 유행하던 미트라교 혹은 이시스교가 국교(國敎)로 채택되고, 서구 문명이 기독교 중심이 아닌 태양신 종교 중심으로 재편되었을 수도 있었겠죠.


그랬더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 미트라와 이시스를 향해 성소(Sanctuary)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을 겁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미트라, 태양인 창조주를 믿나이다) 수천 년 역사, 수십억 명 이상의 가치관과 인생을 규정해 온 종교가 단 한 번의 전투로 생존해 역사의 승자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우리는 역사가 얼마나 수많은 우연과 사소한 선택이 겹쳐진 결과인지 깨닫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연과 해프닝으로 점철되어 있다



1122px-Ferdinand_Behr_arrested_in_Sarajevo_1914.jpg 대공 암살 후 현장에서 체포되는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


다른 일화들도 이야기해 볼까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1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었습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소행이었죠. 사실 이 암살은 실패한 작전으로 끝날 뻔했습니다. 암살단이 처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습니다. 대공 부부는 놀라긴 했어도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병원으로 가던 중이었죠. 그런데 '우연히'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들었고, 차를 돌리기 위해 잠시 멈춘 곳이 하필, 실패에 낙담해 샌드위치를 사 먹으러 털레털레 걸어가던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바로 앞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다음에 벌어진 일은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11-13 133726.png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현장에 있던 우산을 쓴 남자(Umbrella Man)


존 F 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암살된 사건도 역사의 무작위성을 상징하는 일화입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장소, 군집한 인파 속에서 유독 꺼림칙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 아래, 검은 우산을 펼쳐 들고 서 있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골콩드(Golconda)에 나오는 레인코트 신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우산 남자'는 후일 수많은 호사가와 음모 이론가들에게 골백번 오르내리게 된 핫토픽이었습니다. 철저히 맞아떨어지는 인과관계의 그물망에서 그의 존재는 정말이지 신경 쓰였습니다. 그 우산이 암살의 신호였을까? 그는 총체적 음모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헛웃음이 절로 나올 만큼 사소했습니다.


1978년 미 하원 청문회에서 한 창고 직원이 자신이 바로 그 우산 남자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암살 신호를 전달한 요원이 아니었습니다. 우산은 케네디 가문을 향한 정치적 항의 표시였습니다. 체임벌린 전 영국 총리(우산이 그의 상징)의 정책과 당시 주영 대사였던 존 P 케네디의 관계를 비판하려는 의도였죠.


이 일화는 우리가 얼마나 세상의 복잡성과 카오스적 요소를 더없이 빈틈없는 깔끔한 이야기로 간단히 정리하려 하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 확실성을 요구하고, 파편과 편린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풀어내려 애씁니다. 맑은 날 우산을 든 남자는 뭔가 이상합니다. 역사, 인류 더 나아가 이 세상이, 기묘함과 우연 그리고 의미 없는 사건으로 이루어진 무대라고 상상하지 못하는 정신적 빈곤함 탓입니다.




9788937460296.jpg


우리는 흔히 역사를 어설픈 시행착오와 우연한 해프닝으로 얼기설기 짜인 에피소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요철과 단층선을 전부 지운 채 평탄하게 이어지는 서사(Narrative)로 역사를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연도와 사건을 달달 외우라고 읊어대는 역사 교육, 특정 인물들의 영웅적 서사나 일화만 강조하거나 국가-민족의 신화를 찬양하는 베스트셀러 서적들까지.....


우리는 깔끔한 도입부와 완결된 결말이 짜인 스토리텔링만 접해오다 보니 역사가 치밀한 계획과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이 겹쳐진 태피스트리나 직소 퍼즐에 가깝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역사는 종말론적 기독교인이나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이 상상하던 최후의 유토피아로 향해 가는 일직선로가 아니고,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말했듯이 거대하면서도 어설픈 '농담'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역사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


20230706500090.jpg 페터 비에리(1944~2023, 필명: 파스칼 메르시어)


스위스의 철학자 겸 소설가 페터 비에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계몽적으로 깨인 의식은 역사적 우연성의 인식을 뜻한다." (《Wie waere es, gebildet zu sein?》) 한 사람이 교양인이 되는 것은 상대성을 자각할 때 비로소 달성됩니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방식은 어떻게 지금의 형태로 정착되었을까요? 이런 물음을 하게 될 때 지금 우리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수도 있으며,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 체제, 가치체계가 필연성과 형이상학적, 본질적 우월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역사적 감수성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한 연도나 특정 사건을 암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고의 틀입니다. 규명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이 도처에 있음을 알고, 복잡한 맥락을 파악하고, 과거에 실현되지 못한 수많은 역사의 미답지를 인식하는 정신적 태도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20110902_september11_1_53.jpg 건물에 충돌하기 몇 초 전, 일말의 의심이 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적 감수성을 기를 때, 나의 사고관이, 종교가, 문화가, 정치적 슬로건이 역사적으로 우연하게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제야 내가 갖고 있는 관념과 사고를 점검하고 겸손, 호기심, 공감이라는 덕목을 계발하게 됩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나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의 신념을 위해 죽을 생각이 없다." 민간인이 탄 비행기를 하이재킹해 세계무역센터에 돌진했던 알카에다 조직원들은, 이슬람교가 그 뿌리는 무함마드 이전 아라비아 부족의 이교(異敎)적 바탕에 있으며, 꾸란이 오랜 구전 전통을 거쳐 기록되면서 수많은 왜곡과 변형이 이뤄져 왔음을 몰랐을 겁니다. 알라는 아랍 다신교 전통에서 최고신(Allah)이었고, 달의 신(Al-Maqah)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도 무지했죠. 알았더라면 알카에다에 가입하기 전에, 아니 비행기에 타기 전에 한 번은 주저했겠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1709px-Albrecht_Dürer_-_Melencolia_I_-_Google_Art_Project_(_AGDdr3EHmNGyA).jpg Albrecht Dürer - Melencolia I (1514) 불확실성 속에 고뇌하는, 그러나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초상



아래는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역사적 시각의 정의입니다.



역사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


내 고장, 우리나라 너머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는 다른 사회와 모습으로 살아가는 무리가 존재하며, 선과 악이 우리와 다른 기준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의 정체성도 우연히 만들어졌고 임의성을 띤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지금 내가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신념, 도덕의식이 단지 국지적이며 역사적인 우연에 기반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는 태도. 형이상학적 교리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몇몇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하는 의식. 역사의 유일한 상수(常數)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無常)>라는 점을 골수에 사무치게 통절히 자각하는 것. 절대적 진리도 그 출발점은 상대성의 인식에 있다는 것. 내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 자민족 중심주의에서의 자유. 내가 몸 담고 있는 체제의 영속성과 정당성을 의심하기 등등.



목록은 한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역사 속 위인이나 영웅들의 이름과 업적을 암기하고 (살수대첩은 을지문덕 귀주대첩은 강감찬...) , 조선 초 통치 체제가 의정부 서사제였는지 6조 직계제였는지 답하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을 맞았다고 해서 역사를 나름 터득했다고 자평하는 것은 2%가 아닌 20~200% 이상 부족합니다. 정말 중요한 건 역사를 배움으로써 역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은 특정 시대에 살던 오래전 눈을 감은 이들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Doxa(의견)에 불과하다는 자각. 역사를 앎으로써 민족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 아님을 알고, 국가의 흥성이 나의 흥성이 아님을 알며, 지옥불 심판을 경고하는 사제의 설교가 나를 협박하는 환상임을 알게 됩니다. 역사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진리와 확실성으로 향하는 길이 단 하나가 아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삶을 짜내는 방식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이 우연과 선택의 얇은 실 위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유발 하라리는 이 글의 모든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오래 되씹어볼 만한 명문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함께 음미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를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다른 가능성의 운명을 상상하기 위해서입니다.” — Yuval Noah Harari, 「The Best Reason to Learn History」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