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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록 Jul 11. 2024

나를 초록이라 불러주세요

더위에 질색하던 나는 언제나 여름이 싫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다면 봄과 겨울을, 가장 싫어하는 계절을 묻는다면 여름이라 답했다. 어릴 땐 이렇게까지 덥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며 찌는 듯한 더위에 에어컨을 최대한 켜지 않고 참다가 녹초가 되어버리곤 했다. 지구 온난화에 조금이라도 덜 기여하겠다며 여름과 지지부진한 줄다리기를 반복하는 건 그다지 행복한 일은 아니 않을까.


저녁 8시나 되어야 아스팔트에 내린 열기가 가라앉는 한여름엔 밖을 나서면 초록의 무성한 나무들이 뿜어내는 습기와 푸릇한 풀 냄새가 숨 막히게 느껴지곤 했다.


그렇지만 초록이 좋아진 건 작년 봄 즈음부터. 그해 봄은 유난히 나에게 행복한 계절이었다. 처음 맡은 담임이 하필 고3 담임이어도, 매일 야근과 감정 노동의 연속인 학부모 상담 주간을 보내면서도 직장 생활이 행복했던 것은 마음을 나누는 동료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때 3살 위의 영어 선생님, 12살 위의 역사 선생님, 13살 위의 국어 선생님과 함께 편지 쓰기 프로젝트를 시작 참이었다.


3살 위의 영어 선생님은 나의 대학교 선배이기도 해서(학교를 재학중일 땐 서로를 몰랐던) 종종 식사를 함께 하기 시작했는데, 읽은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책을 바꾸어 읽기도 하며 마음을 건네고 건네어 받다 보니 이제는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역사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과 막역한 사이 이 프로젝트에 초대되었는데, 덕분에 나에게도 든든하게 이어진 인연이 되겠다.


우리는 닉네임을 정했고 2주에 한 번 일대 삼의 편지를 이메일로 주고받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나에게 '초록'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다. 5월의 봄이 너무나도 초록초록 했기 때문이었다. 꽃이 지나간 자리에는 노란빛을 살짝 띤 아기 이파리들이 자라나고, 레몬그린 컬러로 변해갔다. 어느덧 출근길이 생그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초록으로 가득 채워지는 거리를 보면서.


언제나 더워지는 계절엔 바다! 를 외쳤던 나였기에 길에 펼쳐지는 식물의 생기로움을 생경하게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출근이 즐겁다니, 그게 어느 정도의 설렘과 기쁨인지 직장인이라면 공감하거나 기겁할만한 말인데, 그때의 나는 출근이 즐거웠다. 풍경 자체가 특별히 좋았다기보다는 마음을 나눌 구석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글을 쓰는 즐거움은 마음을 공유한다는 특별한 유대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연녹빛으로 물드는 거리가 그리고 초록이라는 단어마저 참 아졌다. 솔직히 요즘의 출근은 다시 나에게 고통이 되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올해의 초록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아마 내가 지나온 시절과 그때 나눈 글, 그리고 그 마음들을 아직도 온통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여름은 샌들 너머로 솟은 발가락을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햇빛보다는 눈부신 초록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여름이 좋아?라고 묻는다면, 썩 망설이겠지만. 비로소 싫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초록, 석류, 두두, 쏴아아의 이름으로 일 년을 함께 했고, 지금은 각자의 사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더는 편지를 주고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석류도, 두두도, 쏴아아도 마지막으로 초록도 입에 올려 발음해 보면 왠지 여름 기분이 물씬 든다. 그러니 나를 초록이라 불러주세요. 나의 여름이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존재할지 모르는 어느 여름의 존재에게 부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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