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한 눈망울에 오똑한 코. 다소 이국적인 느낌의 까무잡잡한 피부에 빠르게 2차성징이 찾아 온 슬렌더한 체형. E는 누구라도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아마 이 지역을 통틀어 가장 잘생긴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굴에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여기가 남학교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전교에 소문이 돌고도 남았겠지. 내 눈은 학기 첫 날 부터 그의 얼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일부러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 다른 찐따 하나의 자리였던 것 같은데, 그까짓 게 어디 알 바인가.
그가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던 걸 몰래 엿들으며 알게 된 정보가 있다. 당시 그는 손예진 같은 청순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야기였다. 청순. 그게 뭘까. 청순? 사전을 찾아봐도 이미지가 그려지질 않았다. 친척 형제들에게 물어보니 청순이란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나오는 그런 하늘하늘한 이미지란다. 그렇구나. 그럼 내가 포카리스웨트가 어울리는 청순한 사람이 되면 되겠네.
하지만 청순. 그건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집안 환경이 썩 좋지 못해 예쁘고 좋은 옷을 사서 입는 건 불가능했고(애초에 교복만 입으니 그런 옷을 보여줄 기회조차 없고) 이미 10살 때부터 반에서 누군가를 짓밟아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환경에 놓였던 지라 입만 열면 상스러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공부는 당연히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고, 친구들과 바보같은 짓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던 내게 청순이란 해결할 수 없는 과제와도 같았다. 욕을 사용하지 않고 말하는 법이 세상에 있었어?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거칠었던 시절이다.
그런 내게, 작년에 스스로 학교폭력 피해자를 자처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녀석이 들어왔다. 내가 그 아이를 무척 혐오했던 이유 중 하나엔 알게 모르게 이상한 허세를 가진 태도도 포함돼 있었다. 그 싹을 내가 조기에 밟아버리지 않으면 아주 위험한 아이로 자랄 것만 같았다. 그런 시한폭탄같은 아이일 수록 내면엔 '잘 나가고 싶다' 같은 일진을 향한 동경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껏 내게 그런 애들이 자주 들러붙었기에. 그러면 이번엔. 너를 일진으로 만들어주면 되겠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내 인생에 이름이 생겼다. 지금부터는 그를 '엉겅퀴'로 칭한다.
나는 이번에도 여전히 학급에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엉겅퀴에게 말을 걸었다. 애초에 우리가 정답게 말을 나눌 사이는 아니었기에 적잖이 놀란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당시 내 일주일 용돈 전액이었던 만원권 지폐를 내밀었다.
"이거 줄테니까, 내일, 나를, 엄청 세게 때려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올해도 왕따로 지낼 거야? 싫지? 그러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갑자기 왜?"
"남학교는 서열싸움이야. 네가 애들 보는 앞에서 날 때리면 네 서열이 올라가겠지. 그럼 아무도 너를 건들지 못할거야. 이제 작년같은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아."
"그럼 선생님한테 혼나는 건 난데 내가 뭐하러?"
"그런 일은 절대 없어. 그냥 한 대만 때리면 되니까. 남자애들은 그런 거 안 일러. 나만 믿어."
그가 돈을 받고 꿀꺽할지, 아니면 정말 내 지시대로 날 때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거절해봤자 친구들을 대동해 돈을 뱉으라고 하면 그만이기에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엉겅퀴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진에 대한 동경을 내포한 그가 올해도 왕따로 남아있고 싶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내가 보낸 시그널과 함께 엉겅퀴는 E의 앞에서 내 뺨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역시 사람을 때리는 것도 경력직에게 부탁해야 시원시원하다니까. 생각보다 이렇게 아프게 때릴 줄이야. 덕분에 아픈 연기를 할 필요가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아픈 감정을 호소할 수 있었다. 시끄러웠던 교실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당연히 E도 나를 주목했다. 다른 들러리는 필요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눈을 마주쳐야 하는 상대는 딱 한 명. 자기 옆에서 벌어진 일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그에게,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불쌍한 강아지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때. 이제, 청순해 보이지?
그 날을 계기로 엉겅퀴와 나의 사이는 작년과 완전히 급변했다. 정말로 엉겅퀴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힘이 전부인 남학교에서 '다짜고짜 아굴창을 갈기는' 시한폭탄을 건드릴 리는 없다. 그렇게 그는 작년과는 다른 의미로 고립되었다. 엉겅퀴의 폭력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이래 그를 두려워하는 유약한 초식동물들부터 시작이었다. 서열 최하위에 자리매김한 그 온순한 동물들은 자연스레 엉겅퀴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불가촉 천민이 됐다. 그래.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정확했다. 엉겅퀴는 애초에 '착한' 범주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따돌린 것은ㅡ
ㅡ역시 정의였다.
당연히 나는 그날 이후로 거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유약한 초식동물이지만 연약하지는 않는, 기린이나 팬더같은 포지션이 됐다. 딱 좋았다. 성가시게 구는 놈은 없지만, 청순함은 어필할 수 있는 포지션. 여기까지는 모두 내가 바라는 대로였다.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생각했던 것 만큼 E와 나는 가까워지질 않았다. 바로 옆자리를 계속 고수했음에도 여름방학이 다가올 때까지 둘의 사이가 엄청 친한 느낌은 아니게 됐다. 오히려 우리 사이엔 투명한 가림막 같은 게 존재하나 싶을 정도로 벽이 있었다. 옆자리에서 E와 나는 각각 다른 무리와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어쩌면 이 녀석들이 방해꾼일지도 모른다. 내가 친구가 없었더라면 자연스레 E도 나를 챙겼을텐데. 그러기엔 내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너무나 많은 인맥을 중학교 때까지 끌고 와버렸다. 친구가 많고, 활발하고, 말이 많으면 덜 청순해 보이잖아. 심지어 내 친구들은 그렇게 공부를 잘 하거나 얌전한 애들도 아닌데. 그래. 이런 거친 애들하고 노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어. 나는 이제 엉겅퀴에 덜덜 떠는 초식동물들 사이에 껴서 놀 거야. 그러면 그게 내 청순함을 증명하는 길이겠지.
"안녕 얘들아."
"어어, 안녕..."
"어머 이거 뭐야? 로봇이잖아, 나도 세일러문 좋아해."
건담 매니아였던 초식동물에게 말을 걸었다. 건담의 ㄱ도 뭔지 모르지만 아무튼 만화라는 거지? 그럼 그냥 만화 아무거나 말하면 친해지겠네. 내가 본 만화, 그래, 세일러문. 같은 생각의 흐름이었다. 나도 세일러문을 너무 좋아하니까, 그 건담 매니아와 친해질 수 있겠지. 얘부터 조금씩 노려보자. 이제부터 내 인생은, 거칠고 상스러운 인간이 아닌, 청순하고 우아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참고로 이 건담 매니아는 E와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해, 지금도 뜨문뜨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내 원대한 계획을 위해, 네가 영웅처럼 희생되면 좋겠어. 어차피 건담도 그런 내용 아니야? 잘 됐네.
결국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도 멀어졌고 이제 학급에서 그 때와 같은 영향력을 잃었다. 건담 매니아를 비롯한 초식동물을 이끄는 우두머리 토끼 정도의 서열이었을까. 그럼에도 E와 나는 끝까지 소위 말하는 '친구'는 될 수 없었다. 바로 옆 자리라 핸드폰 번호와 메신저 아이디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무언가를 물어보는 일은 없었고, 나 또한 그를 향한 호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일부러 말을 걸진 않았다. 내가 그런 별볼일 없는 허름한 짝사랑을 진행하는 동안 엉겅퀴는 한 마리 늑대와도 같은 포지션이 되었다. 딱히 '그 날' 이후 그와 말을 섞은 적은 없다. 아주 깔끔한 비즈니스 관계였다. 하지만 엉겅퀴까지 이용해 부단한 노력을 했음에도 E의 마음을 내게 돌리는 것은 실패했다. 답답할 따름이었다. 슬슬 행동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
"뭐해?"
몇 달 만에 처음이었다. 간만에 로그인한 메신저에서 이런 특별한 일 없는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는 게.
"나 리니지 키려고."
"나도 리니지 할까"
"ㅎㅎ하면 도와줄게"
상투적인 스몰토크가 오갔다. 아, 이런 거 안 궁금해. 리니지, 어쩌라고.
"넌 나 어때? 너가 보기에도 나 청순해?"
"아니ㅎㅎ"
아니? 아니라고? 이만큼 노력했는데. 하늘하늘하고 유약하고, 연약하면서도, 욕도 안 하고,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나올 것 같은 청량한 이미지, 그게 청순함 아니야? 나에게 너무나도 관심이 없어서 혹시 잘못 본 거 아닐까?
"왜? 나 건담한테 그런 얘기 자주 들어"
"어ㅎㅎ 건담이 덕분에 그나마 너가 착한 애라고 알았어."
"그게 무슨 말이야?"
충격적인 이야기가 오고갔다. E는 사실 내가 결코 엉겅퀴에게 맞을 만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 상황 자체가 조금 이상했다고 한다. 사유는 이랬다.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일부 아이들이 E에게 나와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단다. 5학년 년때부터 돌아가며 같은 반 아이들을 왕따시켰고, 6학년 때는 그걸로 부모님까지 모시고 와야 했다고. 다들 찍혀서 새로운 타겟이 되는 것이 싫어 친한 척을 해주는 거라고.
그나마 건담 매니아와 친하게 지낸 덕분에, 그리고 그때부터는 이미 내가 청순함을 노선으로 가져가고자 했기 때문에 그를 통해 내가 소문과는 달리 친절하고 상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E도 소문으로 듣던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고.
분명 엉겅퀴다.
나는 범인을 특정짓고, 엉겅퀴의 집 근처에서 그를 기다렸다. 엉겅퀴는 나를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고, 스몰토크 없이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이 씨이이바알년아!!!!!!!!!!"
"뭐 이 씨발년아!!!"
"네가 말했지, 네가 나 사람 괴롭히고 다니던 애라고 말하고 다녔지!!!!!!!"
"내가 씨발 그런 말을 뭐하러 해!"
"그럼 누구야!!!!"
고성이 오가는 조용한 골목길. 재개발도 되지 않은 2000년대 허름한 달동네 골목.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상스러운 워딩. 이미 청순함과 우아함은 온데간데 없는 그 시공간 속에서 엉겅퀴와 나는 지저분한 말을 내뱉으며 서로에게 쌓인 분노를 폭발시켰다.
너무너무 억울했다. 나는 사람 괴롭힌 적 없어요. 그냥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 친구들도 같이 싫어하길래 그걸 표현했을 뿐이에요. 제발 알아주세요. 같은 말이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억하심정에 짓눌린 청순함의 끈이 끊어져 주체가 되지 않아 당시의 감정이 희미해졌다.
헛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보다, 당시 반 아이들이 사실은 나를 불편해서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크게 와닿았던 것은 그것이 결국 돌고 돌아 같은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E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포기하며 이룬 청순함인데, 그건 마치 존재조차 하지 않은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 그것이 예민한 시절의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였다.
그러니까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나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가 있는, 그런 불편한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 하나와. 내 청순함에 도움이 되지 않아 버려버렸던 거친 친구들이 사실은 진짜로 나를 친구로 생각한 유일한 애들이었다는 슬픈 사실 하나가, 아직 다 영글지도 않은 어린 가슴을 팠다는 뜻이다.
결국 나와 엉겅퀴도, 서로 포지션만 다를 뿐, 같은 존재였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관심을 받고자, 서로 다른 종류의 허세, 그것이 센 척이든, 청순함이든, 그런 실체조차 희미한 무언가를 좇아 스스로를 고립시켰다는 점이. 너무나 닮은 꼴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