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노팅힐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춰,
런던타워와 타워 브리지의 낮과 밤이 맞닿는 풍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런던타워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관람 포인트에서 시작해,
성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며 타워브리지로 향했다.
겹겹이 쌓인 런던타워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오랜 세월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회색빛 돌벽에는 수많은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앞에 서자마자 나는
역사 속으로 한순간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수많은 왕과 왕비의 운명이 이곳에서 교차하고,
때로는 권력의 빛이,
때로는 피의 어둠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돌 하나, 창 하나에도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고,
바람조차 오래된 기억의 영혼을 들고
성 안을 조용히 맴도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또 하나의 세계 속에 서 있는 듯했다.
런던 브리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발끝이 과거의 시간 위를 딛고 있는 듯한,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떨림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런던타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까워질수록 성의 실루엣은 점점 또렷해졌지만,
현실은 서서히 비현실로 변해갔다.
눈앞의 풍경을 분명히 보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꿈속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타워 브리지를 건너면
시간의 문을 통과해
역사 속 어느 한 장면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조용히 들뜨기 시작했다.
런던 브리짓 위에서 바라본 런던의 야경.
나는 스무 살의 그 마음 그대로,
2025년의 9월,
다시 런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렇게 이곳에 서 있다.
'이렇게 갑자기 런던에 와 있다고?'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정말 내가 런던에 다시 왔다고?'
'이렇게 여기서 꿈을 만난다고?'
고개를 돌리자,
노을빛이 스며든 강바람 사이로
환하게 웃는 딸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도시의 불빛보다 더 빛나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스무 살의 나를 발견했다.
내가, 딸아이 지금의 나이였던 그때,
나 역시 이 도시의 거리 위에 서 있었다.
나의 스무 살을 꼭 빼닮은 스무 살의 그녀가
나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마치,
3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미소 같았다.
“꿈을 이뤄줘서 고마워.”
그 말이,
바람처럼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정말 꿈속인 게 맞았다.
이토록 비현실적인 순간이라니.
그녀도 30년 후,
이날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꿈이 이어져
또 다른 세대의 기억이 되는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