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모양 눈과 생면 파스타
기온이 영하 10도에서 20도 사이일 때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별모양의 눈결정이 만들어지고 이보다 낮은 경우에는 기둥형이나 판상형 결정이 생깁니다. 눈결정은 작은 육각형 박판으로 시작해 습도가 높거나 온도가 낮아지면서 물분자들이 달라붙어 다양한 모양이 만들어집니다. 결국 습도가 높으면 눈결정이 더 크고 복잡한 형태로 자라나겠죠?
-기상청 [아름다운 눈의 결정체 中]
두두두두
빗방울 같은 우박들이 떨어졌다. 굵은소금 보다 큰 알갱이가 떨어지다가 눈으로 변했다. 눈이 내렸다. 38년째 겨울의 눈을 보고 있다. 눈 내리는 풍경에 내가 그렸던 '눈'은 동그라미였다. 별생각 없이 나에게 눈사람이 되고 싶은 눈은 동그라미였다.
어머, 이게 뭐야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는 시선 끝에, 검은색 유모차 커버 위로 하얀 별모양이 쏟아진다. 눈 오는 날 차를 타고 유리 와이퍼를 좌우로 쓸어내릴 때는 눈모양을 몰랐다. 눈모양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당장 운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 핑계고, 눈모양에 큰 관심이 없었다. 신선하고 깨끗한 눈의 결정체를 보면서 내 삶의 순간들에도 쉼 없이 아름다운 것들이 쏟아졌을 텐데, 여유가 없어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흘려보낸 것이 무수하다 싶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의 연속이야.
아 진짜 출근하기 싫다-!
긴 연휴 끝에 출근준비를 하며 외치는 남편의 말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한데
으, 약 올라!ㅋㅋㅋ
아이가 엄마랑 놀고 싶다는데 오늘은 요가도 휴강일이다. 그래서 어린이집 땡땡이를 치고 마트에 과일을 사러 가기로 했다. 아이와 움직일 때는 차로 이동하는 것이 편하다. 눈이 오기 전이었는데 아이가 오랜만에 유모차를 타고 싶단다. 하의 2겹, 상의 3겹, 마스크, 장갑을 끼워 밖으로 나왔다. 집 근처 과일이 맛있는 마트가 하필 오늘 연휴다. 다른 마트로 유모차 핸들을 돌리는데, 바로 옆 작년 오픈한 파스타집이 보인다.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고는 가본 적이 없었다. 파스타는 집에서 해 먹기도 하고, 아이와 함께일 때는 화장실 데리고 가기 편한 백화점 내 브런치카페를 이용하는 편이다. 지인과 식사약속이 있을 때는 동네를 벗어나 '가보고 싶었는데 혼자 가기 애매한 곳(30분 이상의 거리)'위주로 다녔다. 그러다 보니 매번 후순위로 밀려났던 곳. 마트 문이 열렸다면 오늘도 지나쳤을 그곳에 방문했다. 다행히 딸아이도 파스타가 먹고 싶다는데 주메뉴가 생면파스타다.
와, 왜 이제야 여기를 왔지?
큰 기대 없이 들어가서 시그니쳐 두 가지를 시켰다. 면두께가 다른 두 가지 파스타로. 개인적으론 매콤한 오일 베이스의 링귀니면을 좋아해서 살시토리 파스타가 더 맛있었지만, 매운맛없이 담백한 라구 파스타인 볼로네제 파스타는 5세 딸아이의 원픽이다. 신나게 먹고 일어나는데 뒷자리에 앉은 부부가 인사한다. 눈이 나쁘지만 안경은 운전, 영화 볼 때만 끼기에 가까이 가서야 어린이집 친구 부모님인 것을 알았다. 아이의 친구는 등원했고 부부끼리 처음 생면파스타를 맛보러 왔는데 기대이상의 맛이라며 다음번에 아이들과 함께 오면 좋겠다고 했다. 차가운 공기에 눈발이 날리는 1월 31일 오후 1시다. 유모차를 밀어야 하지만 장갑이 있고, 롱패딩을 입었고, 컵홀더가 있으니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서 다른 마트로 과일을 사러 간다.
바나나는 상태가 좋지 않아 패스, 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는 4팩에 만원인데 알도 커서 제일 먼저 담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단감과 한라봉, 남편이 좋아하는 딸기를 담고 아이가 고른 오징어땅콩 3 봉지를 사서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길 놀이터 앞이다. 유모차 안이 조용해서 자냐 물으니 졸린단다. 그럼 눈사람 못 만들겠네 했더니 "만들 수 있어!!"라며 에너자이저로 변신했다.
오후 2시. 눈이 쌓이기 시작할 때 놀이터에는 딸과 나,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있었다. 딸이랑 눈을 열심히 모아 눈사람의 형태를 만들어가니 슬금슬금 다가와 묻는다.
저희도 같이 봐도 돼요?
아, 오늘 눈 모양 보셨어요?
같이 만들자고 했더니 장갑도 없는 맨손으로 별로 차갑지 않다며 눈사람을 열심히 키운다. 제법 덩치 큰 눈사람을 만들고 눈코입을 만든다. 둘이 하는 것보다 넷이 하니 더 재미있다. 남자아이들은 5학년이라고 했다. 우박 뒤에 떨어진 눈의 모양을 봤냐고 물었다. 유모차를 끌고 걷지 않았다면, 놀이터를 오지 않았다면, 눈사람을 함께 만들지 않았다면 "눈의 모양을 보셨나요? 정말 예쁘더라고요."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내 마음에 새긴 이야기를 누군가 들려준 눈 오는 날.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이다. 오늘 눈 오는 날의 풍경은 별모양이다. 득템의 연속이다. 고마운 마음에 오징어땅콩을 전하고 집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