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 탈출>,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대학생 시절, 대외활동에서 만난 한 명문대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정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대학 와서 알았죠. 전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잘 푸는 사람이었습니다."
명문대생이 똑똑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그런 경우는 있다. 명문대를 나왔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많다. 오히려 망가진 사람도 있다. 혹은 '부모님의 말을 잘 들었던' 친구가 명문대를 잘 간다는 말이 있다. 부모님이 직접 입시설명회를 가고, 부모님이 추천해 주시는 학원에 등록해서 공부를 하면서 성적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창의성은 결여된다.
교육의 열기가 뛰어난 나라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적다. 2023년 문체부 발표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성인 중 '1년에 종이책을 한 권 이상' 읽는 사람의 비율이 32.3%였다. 전자책, 오디오북까지 다 포함해도 43.0%. 바꿔 말하면 절반 이상의 성인이 1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청소년기에는 90%를 넘지만 (당연하지 공부해야 하니깐), 독서가 성인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책을 지속가능하게 읽지 못하는 사회, 결국 창의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며칠 전 한 사설을 읽었다. 인공지능 개발 확대로 새로운 기술을 선도하는 일명 ’튀는 얼간이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 신기한 점은 ’튀는 얼간이들‘이 미국에 주로 나오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왜 그럴까. 사설에서도 나와 마찬가지로 교육의 문제를 지적했다.
나도 그랬을까. 경직된 사고, 책을 읽지 않고 ‘대입’에만 몰두돼 문제만 풀고 있는 학생들. 문제를 잘 풀기 위해 획일적인 시스템으로 교육받고, 획일적으로 대학을 가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아이들. 전형적인 한국인의 루트로 성장해온 나에게 ‘나도 그랬을까’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나도 그랬다.
비운의 명작 <쇼생크 탈출>에는 두 가석방 죄수가 나온다. 첫 번째 가석방 대상자는 브룩스. 쇼생크 감옥에서 50년 있었던 장기수였다. 자동차가 한 두대 지나가던 시절에서, 도로에 자동차밖에 없는 시대가 됐다. 브룩스는 감금된 생활에 길들여져 오히려 자유를 힘들어한다. 결국 자유의 달콤함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다음 가석방 대상자는 레드. 브룩스만큼은 아니지만 40년의 감금은 혼자 화장실도 못 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브룩스와 달리 레드는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난다. 그렇게 만든 동기는 '희망'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해 봤다. 브룩스에게는 없었지만 레드에게 있었던 것은 '앤디'였다. 앤디는 쇼생크에서 유일하게 탈옥한 인물이다. 남들이 익숙해질 때 혼자 궁리를 하면서 보지 않던 곳을 봤다. 남들이 보지 않는 신발을 봤고, 벽이 쉽게 무너진다는 것도 알아냈던 인물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생각'을 했던 인물이다. 레드는 '생각'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 않던,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을 저질러 국경을 넘어 다시 '앤디'에게로 간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말했다. 한국의 학교는 마치 감옥과 같다고.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디자인에 획일화된 목표만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무려 12년 동안 그렇게 살아간다. 창의성 같은 것은 없고 그저 그런 삶에 길들여진다. 문제는 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다. 대학을 들어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부터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는 삶이 펼쳐진다. 무엇을 위해 하는지, 왜 하는지 궁극적인 목표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사회가 깔아놓은 과업을 따라 취업하고 결혼한다.
동기 없는 성과는 사람을 공허하게 만든다. 성과를 이루면 성과를 이뤘다는 것보다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아마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 우울증 환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이유도 이 때문 아닐까. 답을 찾지 못하고 끝없는 공허함 속에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도 나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성장기에는 '앤디'가 없었기에 '브룩스'처럼 외롭고 고된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질문하는 '동춘'(박나은)이 나온다. 동춘은 학원에서는 선생님에게, 집에서는 엄마에게 질문한다. 이걸 왜 배워야 하는지. 그러나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혹은 "커서 알게 될 것이라고"말한다. 동춘에게 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닌 '막걸리'라는 가상의 존재다. 교육을 해야 하는 존재임을 우주적으로 선택했다고 설명하는 영화는 어떻게 보면 절망적인 현실을 뻔뻔하게 풀어가는 듯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기에 공허해 마음의 병을 앓는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에 생각하는 근육도 부족하다. 예전보다는 나아진 추세지만, 그래도 여전하다.
대학시절, 교수님이 수업을 어느 정도 끝내고 항상 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까지 질문 있는 사람." 쉽게 손을 드는 사람은 없다. 대체로 반반이었다. 진짜 질문이 없는 사람, 혹은 내 질문이 과연 이 흐름을 깨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 왜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을까. 질문을 하려면 생각을 해야 한다. 질문할 때마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라고 하거나, '전체적인 흐름과 상관없다'라는 대답으로 일축해 버린 삶을 살았기 때문 아닐까. 나중에 알게 될 거라는 말을 들은 그대에게. 그 '나중'이 된 지금이다. 과연 당신은 모든 답을 다 알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