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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 내게 남긴 것

마음 한편에 커다란 구멍을 달고 사는 인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by 은연주


내게 우울은 언제나 활자로만 존재했다. 동아 국어사전을 펼쳐서 모르는 단어를 더듬더듬 찾아보던 초등학교 2학년 때처럼 우울이 뭔지는 알지만 내것은 아니었다. 경험주의자에게는 경험하지 않고선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울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때 들은 어느 문학 수업에서 교수는 내 글을 두고 '즐거운데 깊이는 없는 글'이라고 평했다. 내가 들어도 맞는 말 같아서 딱히 자존심이 구겨지지도 않았다.


결혼식―이라는 사고를― 겪은 지 2주년을 코앞에 두고 나의 우울을 반추해 보니 몸의 감각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우선 더 이상 우울이 뜻을 가진 낱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늘한 감정이라는 상처의 편린으로 남았다. 흉터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욱신거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멍 때리는 순간이 꽤 잦아졌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종의 방어본능일지도 모른다. 뇌를 일시정지시키고 잠시 그 저릿함이 나를 어서 뚫고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그저께 저녁에는 나를 꽤 오랜 시간 조용히 괴롭히던 과거의 상처를 복기해야만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털어놓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솔직하고 당당한 게 내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는 무탈하게 넘어간 것 같았으나, 어째 그 밤의 기억은 나를 이틀간 좌절케 했다. 애써 떨쳐내 보아도 끊임없이 불안이 올라왔고 혼자서 위축되었다. 불안을 직시하고 그대로 인정했음에도 내 무의식은 스스로 작고 초라해지기를 택했다.


만약 우울이 내 것이 아니었다면―예전의 나였다면―이런 초라한 순간을 소화시킬 줄 몰라서 쓸데없이 빵을 씹고 초콜릿을 삼키며 당류로 도피했거나 쓸데없는 만남과 피상적인 대화로 시간을 채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울은 나를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게 바꿔놓았다. 일부러 동굴에 들어가 위장막을 치고 혼자 조용히 사유하는 고요의 순간을 선물해 줬다. 요즘은 마음이 막힐 때면 상담선생님을 찾기보단 챗지피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곤 한다.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오늘 챗지피티가 나의 초라한 마음에 건네준 만트라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나는 상처를 견디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내가 겪은 일은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깊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 상처까지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진심을 알아봐 줄 사람은 반드시 있다.


불안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는 이 불안을 이겨낼 수 있다.

나는 이미, 나를 가장 잘 지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괜찮다.

나는 충분히 괜찮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고생 없이 자라 속 편하게 살았던 옛날보다 마음 한편에 커다란 구멍 한 개쯤 달고 사는 지금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그 구멍으로 숨은 더 잘 쉬어지겠지. 인생이 또다시 가득 숨차면 그때는 쉽게 내쉬는 법을 알게 되겠지. 더 큰 파도가 오면 그때는 덜 흔들리겠지. 오히려 더 단단히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겠지. 사람에 배신당해 봤으니 좋은 사람을 가려낼 줄 알게 되겠지. 사랑에 크게 아파봤으니 다음 사랑이 나를 찾아오면 더 소중히 지킬 수 있겠지. 다음 사랑을 위해서 잠잠히 기다리는 것도 기꺼이 하겠지.


긴 우울의 끝에 결국 나는 사랑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잠시 방향을 잃은 거라는 생각의 결론에 다다랐다.

내게 우울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몰랐을 것들이다.




오늘따라 이 작은 어촌에는 큰 바람이 불어대면서 강풍주의보가 연신 휴대폰을 때리고 있다.

이 바람이 나의 마음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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