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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과일, 제철 음식이 당길 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

by 은연주


언젠가 요가 선생님이 그랬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히 존재해야 한다고.

과거에 매달리거나 미래를 걱정하느라 전전긍긍하면 현재는 병들기 시작한다고.

요가를 한다는 건 대단한 게 아니라 숨 잘 쉬는 법을 배우는 거라고.


나는 요가를 왜 했었나 가만 생각해 보니 요가를 하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 좋았다. 내 안의 독소가 빠지면서 조금은 착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서툰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 제자리걸음인 날이 숱했다. 옆자리 사람보다 머리 서기를 더 잘하려고 욕심을 부린 적도 있고, 어제와 같이 아직도 타이트한 햄스트링 때문에 아등바등거린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잡았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요가하는 거 아니라고, 살 빼서 모델 같은 몸매를 가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현재를 좀먹어가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매일 마음을 다잡고 요가를 했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요가 매트 위에 섰었다.


사실 ‘지금’을 느끼고 현재에 존재하는 방법은 요가 매트 위에 서야만 가능한 건 아니다. 모든 삶은 언제나 앞만 향해 흘러가고, 매일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에서 '지금 이 순간'을 잘 느끼는 방법은 그 밖에도 많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간다. 약속이 있건 없건 똑같다. 내가 이렇게 외로움을 잘 느끼는 여린 마음이란 걸 나이 서른 중반 먹고서야, 집 떠나 시골에 와서야 비로소 배웠다. 매주 기차를 타도 기차 안의 시간은 늘 어렵고 지겹다. 적막만 낮게 깔리는 열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뿐이다.


알고리즘이 내게 은근슬쩍 복숭아를 보여줬다. 순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과일을 좋아하지만 1인 가구에게 과일은 사치라서 항상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딱 지금 시기에만 짧게 나온다는 알고리즘 속 신비복숭아를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말았다. 제철 복숭아의 적정 가격이 얼마인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철마다 나오는 음식이며 과일이며 자꾸만 입 앞에 들이밀고 이게 보약이야 먹어봐 하던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집밥의 힘을 거의 종교처럼 믿는 사람이었다. 안부 전화를 해도 "어떻게 지내니?"가 아니라 "밥은 먹었니? 요즘 뭐 먹고 다녀?"인 사람.


엄마 덕분에 한평생 제철 음식을 먹으며 계절의 은총을 듬뿍 받고 단단하게 자랐다. 여름이면 항상 식탁에는 꽈리고추찜이 올라왔고, 너무 더워 입맛이 없는 날에는 여름 열무로 담근 김치에 고추장만 넣고 비벼 먹어도 사는 게 적당히 알맞았다. 거기다 수박이며 복숭아, 자두까지. 나의 여름날은 그야말로 행복이 풍성하다 못해 무성할 지경이었다.




결혼과 이혼이 동시에 뒤죽박죽 섞여 여름의 기쁨을 잃어버린 지 꼬박 두 해가 지났다. 여름을 즐기지 못하는 동안 제철 음식, 제철 과일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런데 알고리즘이 무심코 보여준 복숭아 하나에 침이 고이면서 잊고 있던 감각들이 살아났다. 요가 매트 위에 서지 않아도 제철 과일을 한입 베어 물면 여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는데 그걸 놓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또 다른 방법.

서울에서 평범한 주말을 보내고 다시 시골로 돌아오자마자 동네 마트에 가서 신비복숭아 한 팩을 샀다. 냉장고에 넣어 잠깐 식힌 뒤에 한입 크게 베어문 복숭아는 달고 시고 기쁘고 슬펐다.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여전히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울렁거리는 날도 있지만 그건 오늘의 파도가 어련히 내일의 수평선 너머로 데려가주겠지.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면 나아지고 있는 거겠지.




요가매트 위에 서지 못한 지도 어느덧 두 해가 지났고, 나는 영영 ‘지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며시 복숭아가 당기는 걸 보니 조금씩 나아지고 있나 보다.

다행이다.


내일은 7월 1일, 하반기의 시작, 본격적인 여름의 가운데자리.

내일 아침에는 마지막 남은 복숭아를 그릭 요거트에 넣어서 먹어야지.

오늘을 충분히 살아내고 다시 내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건 몹시 좋은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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