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픔과 동행할 수 있을 때...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그때 누린 행복의 일부이다.”
앞서 꼬리를 무는 원망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 “너 그동안 행복하지 않았었니?”라는 반문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삶에서 행복은 당연한 것이고, 불행은 있어서는 안 되는 예외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세상은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지 않습니까? 어두움이 없는 밝음은 없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고, 우리 삶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태어남은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자라가면서 점점 몸이 커가는 것처럼 정신도 자라나고, 그래서 사랑하고, 자녀를 낳고, 기르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삶이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병에 걸리고, 불의의 사고도 당하며, 나쁜 인간에게 얼토당토않은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고, 너무나 억울한 손해를 보기도 하며, 때로는 부모형제 또는 배우자나 자녀 등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크나큰 슬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우자 없이 혼자 일생을 산 사람을 제외한다면, 인류의 모든 사람은 둘 중 한 가지 불행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배우자를 잃거나, 배우자를 남겨두고 먼저 죽는 불행 말입니다. 물론 두 사람이 동시에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참으로 드문 예외일 뿐입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세상 모든 사람, 아니 세상 사람의 절반이 배우자를 잃는 슬픔을 당해. 그런데 너는 왜 혼자 온 세상 슬픔을 모조리 짊어진 것처럼, 마치 너 혼자 이런 불행을 당한 것처럼 호들갑이지?”
그렇기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는, ‘내가 겪는 슬픔’이 가장 슬프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 슬픔은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의 슬픔을 100%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배우자와의 사별이 일생에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배우자의 죽음은 곧 나의 한쪽이 사멸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것이지요. 그만큼 충격이 큰 사건입니다.
그러니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때로는 심신의 건강을 잃고, 또 때로는 뒤따라 죽기까지 할 만큼 극복하기 힘든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멀쩡해 보여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지니고, 말없이 견뎌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죽을 수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내게 남겨진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결국은 이 슬픔을 견뎌내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을 흔히 ‘극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극복이란 것은 슬픔을 이긴다는 뜻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 슬픔을 안고 살아가되, 그 슬픔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선은 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는 죽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사랑,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애써 잊어버리고 묻어버린다고 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 그 사람과의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는 것이 극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극복’과는 좀 다른 의미인 것입니다.
이는 곧 그 사람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되고, 그 사람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즐겁고 아름답게 되새길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사람의 사진, 또는 그 사람과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회상에 잠길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때로 울컥하고, 눈물이 솟기도 합니다. 그러나 슬픔에 못 이겨서 이름도 부를 수 없고, 사진도 볼 수 없는 것과는 분명 다른 차원입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다면 그 슬픔은 ‘극복’된 것이 아닐까요?
서두에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그때 누린 행복의 일부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영화 ‘섀도랜즈(Shadowlands)’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이 영화는 ‘나니아 연대기’를 지은 유명한 판타지 작가이자 기독교 저술가인 영국의 C. S. 루이스의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는 만년까지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50세가 훌쩍 넘어 한 여성을 만납니다. 그 여성은 조이 데이빗먼이란 미국 시인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친해졌습니다. 아마 서로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조이는 전 남편에게서 얻은 아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이주합니다. 그러나 비자 연장이 문제가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분명 싹터 있었지만, 이는 결혼이 아니라 비자 연장을 위한 편법으로서의 혼인 신고였죠.
그런데 조이는 말기 골수암 선고를 받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앞둔 상황이 되자 오히려 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결국 두 사람은 병상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진정한 부부가 됩니다. 그러나 결국 3년여 만에 조이는 세상을 떠나고 루이스는 깊은 슬픔에 빠져 고통을 받습니다. 너무나 빨리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그는 슬픔에 몸부림칩니다.
조이의 아들이 원망 섞인 물음을 던집니다. 왜, 왜?
거기에 루이스가 대답합니다.
“지금 겪는 고통은 그때 누린 행복의 일부다.”
이 장면에서 저도 C.S. 루이스(앤서니 홉킨스)와 함께 울었습니다.
물론 이 말이 슬픔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도 루이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합니다. 이처럼 머리로 이 말을 수긍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극복해 나가는데 든든한 토대가 됩니다. 내가 누린 환하고 밝은 빛이 가진 어두움, 그 그림자임을 안다면, 그림자가 있다고 한탄할 것도 아니고, 그림자를 없애 버리려고 애를 쓸 일도 아니니까요.
나의 슬픔이, 나의 고통이 있기 전,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 슬픔, 이 고통조차도 너무나 찬란한 아름다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때로 울컥하고, 때로 눈시울이 적셔지고, 때로는 울음이 터질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슬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