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경찰 노조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경찰 노조가 인정되지 않는다. 대신 ‘직장협의회’라는 유사한 제도가 있지만, 이는 노조에 비해 활동 범위나 권리 주장 측면에서 제약이 많다. 게다가 대한민국 경찰은 202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 직장협의회조차 없었다. ‘공무원직장협의회의 설립ㆍ운영에 관한 법률’에 경찰이 명시적으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경찰 내부에서는 하위직 복지 개선을 위해 직장협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려 10여 년에 걸친 지속적인 법 개정 요청 끝에, 마침내 2020년 7월 법률이 개정되었다. 경찰도 직장협의회를 설립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개정을 주도한 이들은 모두 큰 기쁨을 느꼈지만, 정작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각 경찰서별로 협의회를 조직하고 운영해야 하는데, 이를 실제로 추진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경남 지역 23개 경찰서 중 협의회 설립을 추진한 곳은 10여 곳에 불과했다. 내가 근무하는 밀양경찰서 역시 나서는 이가 없었다.
법 개정 이전에도 경찰 내부에는 ‘현장활력회의’라는 비공식 소통창구가 있었다. 분기마다 경남경찰청 회의실에서 지휘부와 각 경찰서 대표가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우리 서에는 대표가 없어 경무계의 요청으로 내가 대신 참석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경찰청장과 총경 계급장을 단 과장들이 있는 자리에서 각 서 대표들이 거리낌 없이 현장의 요구를 당당히 전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계급 중심의 조직 문화 속에서도 저토록 솔직한 발언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후 직장협의회 제도가 생겼을 때,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알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좋은 제도를 그냥 묻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회장을 자청하기에는 망설여졌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한 조직의 장을 맡는다는 부담감과, 괜히 나서는 사람으로 비칠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사이 다른 경찰서들은 속속 직장협의회를 출범시켰고, 결국 우리를 포함해 다섯 곳만 남았다.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경무계를 통해 현장활력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자리에서 직장협의회 제도의 장점을 설명하고, 그 자리에서 회장을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한 동료가 갑자기 나를 후보로 추천했고, 다른 후보가 나오지 않아 만장일치로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직장협의회는 정식 법인 단체이기에 법인 등록부터 회비 통장 개설까지 준비할 것이 많았다. 가장 먼저 임원진을 구성했다. 사무국장을 지명하고, 부회장 2명, 복지부장, 청년부장, 여성부장, 홍보부장, 대외협력부장을 선출했다. 경찰서와 파출소 직원들이 고르게 참여할 수 있도록 균형 있게 인원을 배치했다. 이후 세무서 등록, 관인 제작, 통장 개설 등 행정 절차를 밟으며 조직의 틀을 갖춰갔다.
직장협의회의 힘은 결국 회원과 회비에서 나온다. 구성원이 많아야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실질적인 활동이 가능하다. 사무국장과 함께 직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리며 가입을 독려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자발적인 참여를 존중하며 천천히 설득했다. 그 결과 첫 달 40명에 불과하던 회원이 두 달 만에 140명으로 늘었다. 인정받는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 성장이 무척 짜릿했다.
이후 직장협의회 밴드를 개설해 모든 회원을 초대했다. 주요 활동과 안건을 공유하고, 중요한 사안은 투표로 결정했다. 회원이 160명을 넘었을 때, 회비를 얼마로 할지 투표를 진행했다. 임원회의에서 5,000원, 7,000원, 10,000원 중 하나로 정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회비가 곧 우리의 힘”이라는 점을 강조한 끝에 10,000원이 70%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직장협의회는 순조롭게 출범했다. 비록 다른 경찰서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첫 해 회원 가입률이 90%를 넘어서며 빠르게 안정되었다. 출범 당시만 해도 상위 3개 경찰서 안에 들 정도로 활발한 참여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나는 밀양경찰서 초대 직장협의회장으로서 2년간 직원 복지 향상과 소통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