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러 가기 전까지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는, 운동 중에 찾아올 고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견뎌낸 뒤 찾아오는 짜릿한 성취감 덕분에 우리는 다시 운동을 하게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고통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보상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의 길을 선택하고, 결국 달콤한 과실을 얻게 된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굳이 고통스러운 다이어트를 할 필요 있어? 난 그냥 맛있게 먹을래”라며 당장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참 이상해서, 그 고통을 피하려 하면 결국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온다. 체중 증가로 인한 외모 스트레스, 비만으로 인한 질병들처럼 말이다.
영원한 고통은 없다. 그리고 고통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고통의 끝에는 성장과 기쁨, 희망 같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 순간이 힘들지라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산고를 겪은 산모에게 강한 모성애가 생기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어쩌면 모성애가 부성애보다 깊다고 느껴지는 이유 또한 이 고통의 경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졸부’라는 말이 생긴 것도, 고통 없이 얻은 부를 가진 이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일 것이다. 로또 1등 당첨자 중 상당수가 이전보다 더 좋지 않은 삶을 산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고통을 통해 얻은 부는 그 과정이 기억되기에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알게 된다.
우리 삶에는 참 많은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마주하고 이겨낸 사람만이 과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남을 부러워하며 투정하는 이들은 사실 그 고통을 외면한 것이고, 그 투정 또한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라. 대신, 고통 뒤에 올 즐거움을 떠올리며 견뎌라.”
그게 훨씬 더 현실적인 조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