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인가. 새벽잠을 깨우는 불청객이 등장했다. 시간은 정확히 새벽 5시 45분. 그때부터 드르르- 드르르- 하는 세진 않지만 기분 나쁘게 규칙적인 진동소리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내 휴대폰에서 나는 소린 줄 알았다. 아니, 분명히 나는 무음으로 해놓고 자는데. 그럼 대체 어디서 울리는 진동소리지? 다 깨버린 잠에 화가 잔뜩 나서는 씩씩대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진동은 어디 바닥이나 천장에서 울려야 나는 소리일 텐데, 그럼 바닥에 폰을 두고 있는 윗집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여태껏 나지 않았던 진동소리가 왜 뜬금없이 지금 나는 것이며. 알람 진동이라고 하면 왜 삼십 분이 넘도록 끄지 않고 저렇게 방치하는 거야!
첫날 그 진동으로 잠을 깼을 땐 뭐 하루는 그럴 수 있지 생각했다. 그러다 이틀, 사흘, 나흘이 되자 나는 열이 날대로 났다. 안 그래도 몇 년째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들 정도로 잠드는 게 힘든데. 그 귀한 잠을 내 의지도 아니고 타의에 의해 억지로 새벽에 깨어야 한다니.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진동소리는 역시나 윗집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했다. 찾아보다 보니 이미 나같이 윗집 진동으로 고통받는 세대들이 많았다. 심지어 이 문제로 이웃 간에 몸싸움이 나기도 하고 심지어 고소를 진행 중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트러블은 절대 사절이다. 나는 지독한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화로 잘 해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윗집과는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는 것도 거의 없고 단지 어린 쌍둥이 손자를 둔 노부부가 살고 계신 걸로 알고 있다. 그것도 엘리베이터에서 눈인사하며 대충 입수한 정보이다. 워낙 이웃 간에 정도 없고 삭막해진 세상이라 그런지 몇 년 전에 이사 온 이 아파트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윗집 부부는 주말이나 명절에 아이들이 찾아와 우다다 달리기를 종종 하는 것 외에는 상당히 조용하신 편이다. 우리도 아이들이 뛰는 것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윗집 손주들 이번주에 왔네! 발소리가 그새 더 커졌다. 진짜 애들 쑥쑥 큰다 그지~” 그렇게 웃으며 넘겼다.
그러다 윗집의 아주머니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어유 이번 설에 손주들이 많이 뛰어서 시끄러웠죠? 미안해요”라고 사과를 하셨다. 나는 “아니에요. 가끔씩인데요 뭘”이라고 말씀드렸다.
그 정도의 관계였다 윗집과는. 그래도 크게 나쁘지 않은 사이였기에 최대한 대화를 둥글게 좋게 좋게 해서 진동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다.
이웃에게 별도의 용무가 있으면 경비실을 통해서 연락을 하는 편이 좋다고들 하던데, 그것보단 나는 그냥 얼굴 보고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윗집에 사람의 기척이 들리면 얼른 올라가서 직접 말씀드려 볼 생각이었다.
하루종일 조용했던 윗집에서 저녁 7시쯤 되니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지금이다. 나는 밥 먹던 숟가락을 탁 놓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가글을 급하게 하곤 옷매무새를 대충 확인한 후 망설임 없이 윗집으로 올라갔다.
사실 당당하게 올라가긴 했지만 막상 문 앞에 서니 무척 떨렸다. 타고나길 소심하고 싫은 소리를 하기 어려워하는 성격이라 이런 상황이 너무 쑥스럽고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소중한 나의 수면권을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띵똥띵똥- 현관 초인종을 꾹 눌렀다. 잠시 후 윗집 아주머니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오셨다. 나는 “안녕하세요. 밑집 사람입니다. 우선 이렇게 찾아뵙게 돼서 죄송해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현관 바로 앞에 있는 방에서 새벽 5시 45분가량이 되면 진동소리가 계속 울리고 그 소리가 끊기지 않고 삼십 분가량 계속 납니다. 혹시 최근 진동을 해둔 적이 있으신가 해서 여쭤보려고요.”라고 말씀드렸다. 일단 진동소리가 윗집에서 나는 것이 맞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어머. 그 소리가 거기까지 들렸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휴.. 천만다행으로 윗집이 맞았다. 아주머니께서는 “아니 원래 안방에서 우리 아저씨 하고 자다가 요새 날이 추워져서 난방비도 아낄 겸 작은 방에서 잤지~ 근데 아저씨 출근할 때 알람을 해놓고 자는데 우리 둘 다 잠귀가 어두워서 진동소리를 못 들었나 봐요”
아 이제 왜 갑자기 진동소리가 났는지. 그렇게 오래 진동이 멈추지 않았는지 다 설명이 되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정말 죄송한데 제가 그 소리에 잠을 다 깨버려서요.. 사실 수면제를 먹는 상황이라 잠이 정말 소중하거든요. 가능하시다면 진동을 소리로 좀 바꿔주실 수 있으실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부탁드렸다. 내가 그 말을 하자 아주머니께서는 정말 미안해하시며 아저씨 오면 꼭 이야기해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간곡한 마음으로 인사드렸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티는 안 났겠지만 엄청 속으로 떨렸었다. 혹시 윗집이 아니면 어쩌지. 혹시 진동소리 가지고 예민하게 왜 그러냐고 화를 내면 어쩌지. 하는 별에 별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윗집 아주머니는 너무 친절하게 받아주셨고 일이 잘 해결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날 밤 비장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제발 제발 진동아 멈추어라. 천만 다행히도 그날부터 새벽의 불청객은 이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에 눈을 뜨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이제 해방이다! 하는 마음이 들어 너무 시원하면서도 바로 불편을 고쳐주신 윗집에게 너무 감사했다. 윗집은 단순히 손주가 있는 노부부에서 친절하고 배려심 있는 좋은 이웃으로 하나의 정보가 더해졌다.
그러다 우리 집은 그럼 윗집에 과연 좋은 이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문득 생겼다. 윗집에서도 그렇게 배려를 해준다면 우리도 그만큼 이웃집에 신경을 써드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앞으로 문을 쾅쾅 닫지 말고 문고리를 잡고 문을 닫는 순간 살짝 놓으라며 당부를 했다. 그리고 나는 방에서 스트레스 풀 겸 우렁차게 불러대던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는 정도로 줄이기로 했다. 엄마가 TV를 보며 악! 하고 놀래서 나는 소리도 “쉿!”하고 밤에는 주의를 드렸다. 아빠가 별생각 없이 쿵쿵대며 걸으면 “발망치!” 라며 눈으로 레이저를 쐈다. 그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조심하며 좋은 이웃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로 온 가족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윗집에서 먼저 베풀어주신 따뜻한 배려로 우리 집은 또 다른 배려를 이어갔다. 그 배려가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윗집은 크게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곳곳에서 조심하고 신경 쓰면서 윗집에게 고마운 마음을 작게나마 전하고 있다. 우리의 배려는 윗집의 배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는 중이다. 아마 배려는 기분 좋은 전염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