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봤지? 내가 이겼다!”
코로나 19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 그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시기가 내가 호흡기 중증장애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서, 나는 코로나에 걸리면 정말 끝장나겠구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 솔직히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중증 환자들, 사망자들을 보고는 너무 두려웠다. 내가 저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 무시무시한 코로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밖에 나가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집에만 있었다. 살기 위해서.
그렇게 초반의 매우 강력했던 코로나는, 점차 변이에 변이를 거치면서 그 강도가 많이 약해졌다. 이제는 4급 감염병으로 분류되어 별도의 격리도 하지 않는 쉬운 병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중증호흡기 장애인이니까. 약하든 세든 저 무서운 병에는 절대 걸리지 않아야겠다는 신념으로 어딜 가든 KF94 마스크를 끼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도 다 끝났으니 만나자는 친구들에게도 선뜻 그러자고 말하지 못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중증 호흡기 장애인이라는 타이틀이 너무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는지, 나는 어쩌다 보니 세상에서 제일가는 겁쟁이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한 덕에 올해 말까지도 무사히 잘 지나갔다. 그러다 10월의 어느 날 회사에 다녀온 아빠가 열과 오한이 난다며 앓아누우셨다. 엄마와 나는 설마.. 했다. 그렇다고 차마 열이 펄펄 끓는 아빠에게 혹시 코로나 일 수도 있으니까 나가서 지내라고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아픈 아빠도 가족들에게 돌봄 받고 싶고 기대고 싶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어서 불안한 마음을 차마 티를 내지 못했다. 다행히도 아빠는 3일 만에 툴툴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엄마와 내 목이 간질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직감했다. ‘아 이거 코로나구나’ 그렇게 피하고 조심을 했건만 걸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자가키트를 하고 선명한 두줄을 본 순간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엄마 나 이제 어떡하지? 나 중환자실 가는 거야?” 엄마는 당황해하면서도 나를 꼭 안아주며 “요즘 코로나 약하잖아 너무 겁먹지 말자”라고 나를 달랬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급하게 입원집을 싸기 시작했다. 당장 입원에 필요한 물품들은 로켓배송으로 다음날 당장 받아볼 수 있게 한가득 시켰다. 내가 매일 쓰는 블로그 일기장에도 긴 장문의 심경글을 썼다. 내가 다시는 이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이렇게 남긴다.. 며 아주 비장하게 전투에 임하는 상황 마냥 심각한 글을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차 코로나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외로 생각보다는 증상이 심하지 않았다. 하루 동안 올랐던 열도 약국 약을 먹으니 바로 잡혔고 후각과 미각이 없어진 것 외로는 특별히 힘든 증상은 없었다. 조금 머쓱해졌다. 나는 입원은 무조건이고 운이 나쁘면 중환자실까지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코로나는 2주 정도만에 모든 증상이 마무리되었다. 특별한 약을 쓴 것도 아니고 단지 약국약을 꾸준히 먹었을 뿐이었다. 거실에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던 입원짐을 쌌던 캐리어도 다시 옷장으로 집어넣었다.
오랜 투병 기간 탓에 ‘나는 약하다.’‘ 나는 작은 병도 크게 만든다.’ ‘나는 무조건 어떤 병이든 걸리면 절대 안 된다.’ 하는 그런 약한 마음이 어느새 나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몸은 보란 듯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깨끗하게 물리쳐 주었고, 내가 전염병에 굴복하는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이전에는 세상 제일가는 겁쟁이였지만 큰 일을 겪고 보니 앞으로 살아갈 내 앞날에도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임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이번 코로나로 분명히 알게 된 점은 나는 단지 병약한 호흡기 장애인이 결코 아니고 힘든 일을 이겨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었다. “봤지? 내가 이겼다 코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