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터로 벼를 갈아엎다>
먼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을 떠 올리며 이 글을 쓴다. 나는 50년대 마지막 해에 태어났다. 58년생 개띠는 극적인 세대로서 자주 조명되곤 하지만 59년생 돼지띠들은 그럭저럭 묻혀 지나간다. 이들은 올해 만 65세로서 노인 대열에 첫발은 디딘 세대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공감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1953년에서 196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극적인 세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 현기증 나는 세대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서 온 국토가 폐허가 된 각박한 곳에 그냥 던져졌다고 표현하고 싶다. 물론 나는 면소재지의 시골에서 자랐으므로 내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강렬하게 각인된 경험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 당시에는 고아가 넘쳐났다. 가정이 있다 해도 너무 가난하여 호구지책 일환으로 부득이 고아원에 입소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왜소했지만 강하고 거칠었다. 세상을 오롯이 홀로 살아내기 위하여 몸으로 체득한 지혜였을 것이다.
당시 국민학교 운동장에는 삼륜차가 종종 드나들었다. 옥수수 빵과 고체로 된 사각우유 등을 학생들에게 배급하기 위해서다. 그 무렵 농촌 수준은 세끼를 모두 챙긴다는 건 사치라 불릴 정도로 배고픈 시절이었다. 외국(주로 미국) 원조품 덕에 보리밥 외의 식품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어떤 때는 배당량이 모자라게 되는데 주로 부잣집 아이들이 양보했고 나는 가난했지만 간혹 체면 때문에 동참했다. 모자란 원인은 주로 배고픈 학생들의 중간 탈취 때문이었다.
말단 경찰직에 봉직했던 부친께서는 일정 기간 동안 박봉의 일부를 밀가루로 대신 받아오신 적이 있었다. 변변한 농사도 없고 요령이 없으셨던 부친은 적절하게 타락하지 못한 성품 때문에 우리 가족은 항상 허기를 느끼며 살아야만 했다. 점심은 대부분 분식으로 대신했다. 밭일하다 때를 챙기러 돌아오신 어머니를 돕기 위해 칼국수 재료 만들기는 내 몫이었다. 나는 돗자리 위에 밀가루 반죽을 놓고 빨래 방망이로 하염없이 밀어대곤 했다. 친구들은 뛰노는데 나만 놀지 못하여 입이 퉁퉁 부어올라 있을 때가 많았다.
쌀은 정말로 귀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밥그릇에는 쌀 성분이 조금 우위를 차지했지만 우리 오 형제의 밥그릇엔 쌀알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소량으로 존재하는 쌀알의 끈적임 덕분으로 인해 보리밥알이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사태만 겨우 방지할 수 있는 비율이었다. 어머니 그릇은 말해 무엇 하리오! 보리밥마저 그릇을 가득 채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조부님은 밥을 전부 드시지 않고 항상 쌀밥이 많은 쪽을 일부 남겨 두시고선 먼저 식탁에서 떠나셨다. 손자들 돌아가면서 쌀밥 맛을 보라는 깊은 사랑이 깔린 배려였다.
보리밥은 맛이 없었다. 먹어도 금방 뱃속이 허전하다. 보리는 단박에 밥을 지을 수가 없다. 단단하기 때문이고 지금처럼 도정기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보리쌀을 초벌로 삶은 다음 소쿠리 등에 넣어 걸어두었다가 정식으로 밥을 지을 때 쌀이나 좁쌀과 함께 다시 물에 담근 후 불을 지핀다. 볏짚이나 나뭇잎 등을 연료로 사용하는데 때로는 연기와 사투를 벌였다. 오 형제만 있었고 넷째였던 나는 형으로서 대우도 못 받고 막내로서 사랑도 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위치였다. 집안의 궂은일은 운명적으로 나에게 할당되는 빈도가 높았다.
최근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를 보았다. 한창 수확해야 할 벼를 그대로 트랙터를 이용하여 갈아엎는 사진을 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기사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동물 사료로 사용할 계획까지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글 서두에 우리 세대를 롤러코스터에 비유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까지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농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영농기술 발전으로 과잉 생산을 하는 데다 쌀소비는 줄고 국제협약 때문에 의무적으로 쌀 수입량까지 정해져 있으니 속된 말로 이런 코미디가 따로 없다. 물론 우리도 반도체와 자동차를 팔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어찌 유리한 것만 취할 수 있겠는가? 당분간 쌀 재고가 넘쳐나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세심한 역할이 더욱 요구된다. 비상시 국제사회가 식량을 무기로 삼는 식량안보 문제에도 대비하고 농민의 소득을 적절하게 보장할 수 있는 정책 개발에 온 역량을 쏟아야 한다. 인구 증가 정책에 쏟는 노력만큼 에 준하는 수준으로 격상하여 심각한 농어촌 문제의 연착륙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하라는 권고의 반대로 해야 우리가 살아남는다.”라는 농민단체의 불신 구호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앞으로는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능력이 없는 주체가 집권을 하면 재앙이다. 현재 상황이 국내외적으로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전문가들이 문제해결을 주도하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농민들도 변화에 적극 응해야 한다. 떼를 쓰면 받아주는 응석받이 같은 행동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벼를 갈아엎으면 철새들은 춤을 추겠지만 나 같은 이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하지 않다. 정성스럽게 수확하여 세상에 내놓으시라. 그게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