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시선을 먹이로 삼는 인간>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라는 자극적인 광고 카피를 만들어 낸 사람은 부자였을까? 부자라면 평소 소신이 발현된 것일 테니 신박한 아이디어라 할 수 없어 놀랍지 않다. 반대로 피고용인으로서 급여를 받으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입장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많을수록 좋은 보상을 받기 위해선 해당 광고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화감을 조성해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9월까지 유난히 더웠다. 날씨 영향 때문인지 괴상한 글 하나가 온라인상에 나타났다. 지은이가 임대아파트 자치회장이라고 밝히면서 작성한 글인데 자기 비하의 전범(典範)이며, 동병상련이란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글이었다. 입주민이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면 치우는데 별도 비용이 발생하니, 집도 없는 거지나 비슷한 주제에 자제하라는 내용이었다. 공공질서를 지키자는 말은 구구절절 맞지만 굳이 자신들을 “임대아파트 사는 거지”라고 까지 스스로 비하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빌거”, “휴거”란 단어도 입주자 자신들이 자조적인 표현으로 창안한 신조어가 아닐까? 부자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며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수도자가 아닌 바에야 타인의 감정 따위에 신경을 써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는 곳의 담장은 성처럼 점점 높이 올라간다. 가난한 사람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며 세상을 원망한다. 유유상종은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난 현상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근대 이전처럼 신분 차별과 직접적인 신체 구속행위가 없어졌을 뿐이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새로운 계급이 출현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세상 돌아가는 작동원리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민낯"이라는 용어를 시도 때도 없이 들먹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허공에 대고 지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자본주의 이전 다른 체제에서도 역시 빈부차와 편 가르기 현상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같은 무리의 깃털에 끌리는 우리네 본성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인 셈이다. 없는 자가 아무리 불만을 외쳐도 가진 자의 귀에는 무능한자의 푸념소리 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보라. 당신이 부자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라도 있는가? 그럼 계층 간 갈등의 폐해를 완화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빤한 얘기지만 나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찐 보수주의자가 가장 경멸하는 인간 유형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근면 성실해야 하고 불굴의 정신으로 도전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성공하라는 뜻이다. 탓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면 아예 시작을 않는 게 좋다. 대신 차별 대우라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치욕은 참기 어렵고 최선은 다하기 싫다? 이경우는 구제불능이다. 육체 정정하고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면 어느 선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일종의 정신승리 영역이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주체적으로 산다고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자신의 참의지에서 출발한 것이어여야 한다. 현재 처한 상황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빌려 오면 잠시는 위로가 될지 모르나 또다시 갈등의 늪으로 빠지는 건 시간문제다. 애석한 일이지만 한정된 재화 앞에서 모두가 승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간의 탐욕에 한계를 설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차등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는 곳을 말하는 순간 내가 드러난다.”는 말을 귀하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천박한 사람들이나 입에 올리는 짓이라 생각하는 이상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게 인생이지’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정답은 없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