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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등산 - 남편이 오른 <한국의 100대 명산>

by 황옹졸

"나 오늘 뭐 해?"

바빠 죽겠는데 또 사람 귀찮게 한다. 혼자 있어야 하는 하루가 막막한가 보다. 초등학생이 따로 없다. 뒤도 닦아주라 할까 걱정이다. 나의 늙은 아들. 사는 날까지 남과 여로 지내고 싶었는데 허황이었다.


누구처럼 차려주는 밥 먹고 본인 몸뚱이만 챙겨 출근하면 무슨 서두를 일이 있으려고. 새벽부터 세탁기 돌려 빨래 널고 애들 먹을 것 챙기고 재활용, 음식물 내다 버리고. 아, 말만 해도 힘이 팽기다. 가사분담이라는 고상한 단어는 우리 집에선 남북통일만큼 멀고 지난한 얘기다. 나는 지금껏 가정주부로만 살았고 이제야 사회생활이란 걸 1년 해보았다. 집 밖은 미지여서 돈 버는 게 무지무지무지 고단한 줄 알았다. 집에 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만큼.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애쓰는 노고에 늘 안쓰러웠다. 그런데 직접 돈을 벌러 나가 보니 그렇다, 힘들다. 맡은 물리적인 일도 일이지만 누가 크게 뭐라 하지도 않는데 괜히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하는 스트레스가 큰 것 같다. 허나, 허구한 날 못 일어나고 누워 만 있어야 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상식이 있고 마누라도 이뻐라 한다. 일단 문제는 더러움과 깨끗함의 차이를 잘 모른다. 안방 화장실을 전담으로 맡겼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청소할 생각을 안 한다. 잔소리를 참고 기다려 주기를 작정했는데 이건 해도 너무 하지. 나는 도저히 안방 변기에 앉아 일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 남자는 아무렇지 않았다. 설거지가 무더기로 쌓여 라면 끓일 냄비 하나 남지 않아도 빨래를 못 해 신을 양말과 몸 닦을 수건이 떨어져도 남편은 문제가 없다. 라면은 뽀글이가 맛있다면 봉지에 바로 끓는 물을 부었고 운동화엔 맨발이 편하다고 말했다. 수건은 빨래통에서 다시 빼왔다. 평생학습이라지만 배우자에게까지 적용되는 줄은 몰랐다. 아직도 새로운 면이 있다니. 그래서 하나씩 이거이거이거 하라고 일러 줬는데 지시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낼모레면 지천명이라는 반백살 아저씨가 날마다 명령에 복종하는 일이 무슨 기분 좋은 일이겠는가. 말하는 나도 한결같은 좋은 언성이 나오지 않는다. 1년 숱하게 싸우다 참을성 없는 내가 포기했다. 아들이라고 생각하자. 자식에겐 몸이 닳도록 해주고도 늘 미안한 마음 아니던가.


"산에라도 가든지."

선크림을 바르며 건성으로 내뱉었다. 몸이 거미형으로 변하는데 도통 운동을 안 한다. 뭐 나도 마찬가지지만. 며칠 전 통화한 아가씨(남편 여동생)가 요즘 주말마다 등산을 재밌게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한국의 100대 명산 오르기에 도전 중이라고 했다.

"산, 무슨 산?"

어디까지 지시를 내려줘야 하는 것인가.

"무등산?"

사실 근방에 어떤 산이 있는지 잘 모른다. 광주전남에서 가장 알려진 곳이라 그냥 입에서 나온 말이다.

"알았어, 근데 어디에서 올라?"

말은 잘 듣는데 스스로 하는 게 없다. 나도 문제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어야는데 또 검색을 하고 있다. 화순 '무등산국립공원 수만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르는 게 최단 코스라고 한다. 왕복 7km로 초급자는 네 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고. 카톡에 공유해 주고 화장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집을 나왔다.


10시, 오르기 시작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하트 이모티콘을 보내 주었다. 뒤로 계속 산의 사진이 올라왔다. 장불재, 입석대, 서석대. 무등산에도 주상절리가 있는 줄 몰랐다. 멋있다. 숲을 배경으로 찍은 얼굴만 대따 크게 나온 셀카는 뭐랄까, 웃기기도 짠하기도 하다. 나가면 연락 같은 건 안 하는 사람인데 오래 사니 다양한 일을 겪는다. 산행이, 더구나 혼자 하는 등산이 괜찮은가 보다. 전화벨이 울린다. 12시 30분이다.

"나 내려왔어. 점심 뭐 먹지?"

"뭐 벌써? 서너 시간 걸린다던데. 두 시간 반밖에 안 됐잖아."

"그래? 쉽던데."

"와, 체력이 이렇게 좋았어? 뭐야, 근데 그 힘을 왜 나한테 안 쓰지?"

"이 아줌마가 대낮부터 불경스럽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여. 끊어. 아아, 자기야 잠깐만. 영주는 100대 명산 중에 몇 개 올랐대? 무등산도 순위에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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