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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

2. 선운산 - 남편이 오른 100대 산

by 황옹졸

아가씨는 열두 봉우리에 올랐다고 한다. 남편은 곧 따라잡겠다며 큰소리쳤다.


'100대 명산 여권'이란 게 있다. 여권 크기의 조그마한 수첩으로 산림청에서 선청한 대한민국 100대 산 명단과 각 산의 정상석 사진이 나와있다. 검지가 혀에 오래 머무른다. 진지하게 침 바른 손가락으로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더니 1년 안에 다 오를 수 있겠단다. 무등산이 수월했는지 의지와 자신감에 불이 붙었다. 그러려면 일주일에 두 군데는 다녀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1일 3산, 4산 하는 사람도 많아."

"아니 그게 지역 근방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저 멀리 강원도 경상도에 있는 건 어떻게 할 건데."

"1박이나 2박 하고 와야지."

"부자세요, 시간이 그렇게 많아, 돈 안 벌어?"

"흥, 나쁜 여자."


연애 시절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게 해 주겠다고 내 손을 꽉 잡고 주머니 깊숙이 넣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기는 많이 낳고 싶다고 했다. 축구팀을 만들 수 있을 쯤으로. 많은 아이와 보드랍고 매끄러운 손은 모순임을 그때는 몰랐다. 예수가 잡히던 밤, 베드로는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지만 그도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짐을 뱉던 순간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를 거짓말쟁이라 몰아붙이고 싶지 않다. 손에 한 방울의 물도 허락지 않을 만큼 날 아꼈던 남자의 마음이 한 주머니에 두 손이 들어있던 그 시간에는 진짜였다고 믿는다. 다만 우리는 둘 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제정신이었다. 열정의 시간에는 이것이 바른 정신이다. 아직 삶을 덜 겪어서 몰랐던 것이라고 하자. 무식하면 용감할 확률이 높다. 많이 시간이 지나고야 우리 가진 힘으로는 어떤 진실되고 신실한 의지도 지켜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다짐이나 맹세 같은 건 아끼고 아낀다. 그는 말수가 줄었고 나는 의심을 많이 하는 쪽으로 변했다.


오랜만의 그의 호기를 받아 주지 못해 조금 미안하다. 선운산이라며 끝이 안 보이는 계단 사진을 보내왔다.

"계단 너무 힘들겠다."

"어, 천천히 가면 돼. 이 계단을 어렵게 만든 사람도 있는데 오르기만 하는 사람이 징징대면 쓰겠어."

"뭐, 그렇게 착했어? 그 착함을 왜 나한테 안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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