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모악산 - 남편이 오른 100대 명산
이 사람을 만나고 다른 이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인가. 당연한 건 없다고 믿기에 누구에게라도 성실하였노라, 칭찬을 듣고 싶다. 삶의 여러 부분이 건성인데 여기에는 정성을 들였다. 물론 나름이다. 상대의 의중은 모른다. 간간이 짝사랑, 첫사랑, 풋사랑이라 불리는 지나간 시간의 감상에 빠지거나 멀리 걷는 훤칠한 사내에게 눈알이 움직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건 찰나였다.
모악산에 오르는 중이라고 한다.
데이트할 때 가끔 가던 곳이다. 전주에서 구이를 넘어 모악산 가는 산길에 수제비를 잘하는 집이 있었다. 구불한 산길을 운전하면서도 오른쪽 손은 내 왼쪽 손을 잡았다. 수제비 국물이 입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지나는 광경을 진지하게 지켜보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꽤나 좋은 나의 기억력이 우리의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된다. 그때 받은 사랑의 양이 상당해 아직 고갈되지 않았다.
그 산에서 먼저인 사람이 있었다. 새내기 한 달이 지날 때쯤 나를 쫓는 눈빛이 있다는 걸 알았다. 눈꼬리가 길고 밝은 갈색 눈동자라 쉽게 알아차렸다. 구름 뒤에서 정체를 드러낼 듯 말 듯하며 비추는 해처럼 내 움직임을 따라오는 그 갈색 눈빛은 꽤나 매력적이라 한동안 깊숙이 즐겼다. 그러다 말을 건네받았다. 시간이 있냐는 말이었다. 당시 나에게 시간은 쏟아지는 빛처럼 한정 없는 것이었지만 없다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항상 바빴는데 돈을 벌어야 했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다. 애를 써야 하는 상황이 세련되지 못하게 여겨졌다. 나 역시 촌스러웠다. 시간을 내어주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긴 꼬리 갈색 눈은 여전히 따라다녔다. 여름이 다 끝나는 무렵 메일을 받았다. 어떤 요구 없이 지루했던 여름을 서술하는 편지였다. 나 역시 지겨운 계절이었다고 답장을 보냈다. 10월이 오는 9월. 다시 한번 시간이 있냐는 말을 들었고 이번엔 응했다. 차를 타고 구불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고개를 넘어 모악산 입구에 내렸다. 쌀쌀했다. 움츠리는 나에게 입던 베이지 카디건을 벗어서 주었다. 고마웠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산채비빔밥 가게와 전통 찻집이 즐비한 거리에서 좌판에 양껏 쌓인 군밤을 만나 한 봉투 샀다. 두 알을 까 내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했다. 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악산이라고 하니 찰나에 스친 이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