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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3. 대둔산 - 남편이 오른 100대 산

by 황옹졸

원래 산을 좋아했던가? 아닌 것 같다. 같이 산책을 나갈라치면 나는 조용히 동네 뒷산 둘레를 걷고 싶은데 이 사람은 도시의 빛과 소음이 가득한 데로 이끈다. 눈도 번잡하고 귀도 시끄럽고 곳곳의 신호등 때문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일이 정신 사납다. 로또까진 아니라도 많은 부분 맞지 않는다.



"올라 보니 좋아?"

"아니."

"근데 왜 산이야?"

"그냥, 100을 이루고 싶어."




'이루고 싶다.'라는 이이의 말이 목구멍에 얹힌다. 열심히 살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가, 이룬 게 없다. 뭘 꼭 이루고 싶었냐고, 그게 중요했냐고 묻는다면 미국 사람처럼 손바닥을 펴 양쪽으로 벌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수밖에 없다. 난 처음부터 꿈이란 없었으니까 아까운 미련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나름 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시간과 물질을 들였는데.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면 속이 아리다. 더 노력하지 않은 우리의 탓이니 이러니 저러니 변명을 늘어놓기도 멋쩍다. 이만큼이라도 하느라 수고하였다고 박수를 쳐 주자.



깊은 골짝과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에서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럴 성질은 아니고 알지만 자기 연민에 빠져 신세한탄을 하며 걸을까 조금 걱정이다.


11시 45분 '대둔산', 16시 45분 '내려왔어.'라는 카톡을 보내며 주차장 갈라진 아스팔트 틈으로 풀이 자라고 있는 사진에 '잡초의 생명력'이라는 문장을 썼다. 촌스러운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낙조대 비석을 찍은 사진이 곧이어 왔다. 이 사람은 나를 모른다. 나는 산의 정상 또는 잡초의 끈질김에는 관심이 없다. 거기가 백두산인지 에베레스트인지 이 녀석이 아스팔트 사이를 뚫고 나왔든 대리석을 뚫고 나왔든 흥미가 나지 않는다. 그런 데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가 빠졌을 상념을 공감하려 애썼다. 아무나 디딜 수 없는 고결한 높은 곳에서 당당히 선 정상석과 누구나 밟고 지나가는 가장 밑 천한 데 움츠려 몸을 내민 이름을 알 수 없는 풀. 그래서 정상석이 되겠다는 건가, 잡초가 되겠다는 건가? 두 간극이 크다. 이분법적 접근을 미워하는 편이나 왠지 인생이 그런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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