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팔영산 - 남편이 오른 100대 명산
이번 주는 이 사람이 무척 바빴다. 잠을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목포와 군산 그리고 서울까지 오가야 했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왔고 목요일에는 거의 10시간을 운전했다. 졸음운전을 해 사고가 나거나 과로로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내일과 모레도 밀린 일이 산더미라고 한다. 다행히 오늘 하루는 쉴 수 있다.
출근이 바빴지만 초췌한 몰골이 안쓰러워 아침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어묵탕을 끓이고 갈치를 조리고 김치를 얌전히 썰어 접시에 놓았다. 메리야스에 팬티 바람으로 식탁에 앉는다. 몇 년은 늙어 보인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알았지?"
"어, 안되는데."
"왜, 무슨 일 있어?"
"팔영산 가려고."
"팔영산은 무슨 팔영산이야, 죽고 싶어? 나이를 생각하셔. 주말에도 바쁘다며."
"보니까 울릉도에도 100대 산이 있어. 거기까지 가려면 하루가 바빠. 시간 있을 때 하나라도 더 올라야 해."
"팔영산 힘들대. 봉우리가 여덟 개라잖아. 오늘은 무리야. 정 그러면 유달산 가."
"유달산은 100대 산에 안 들어가."
아빠가 한동안 아프기는 했지만 죽을지는 몰랐다. 병원에 다녀온다는 아빠를 친절하게 보내주었다. 며칠 안 있어 장례를 치렀다. 나는 학교 들어가기 한 해 전이었고 엄마는 서른두 살이었다. 자랄 때는 알지 못했다. 이 사건의 상처가 나를 이루는 구성물질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자치한다는걸. 항상 연애에 시원하질 못했는데 사랑을 잃고 지내야 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겪어서 그랬던 것 같다. 결혼은 그걸 더 증폭시켰는데 전에는 단순 이별이라면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즉, 죽는다는 극단적인 공포가 들어왔다. 이이가 밤늦게까지 안 들어오거나, 정신을 못 차리게 아프거나 아주 먼 데로 출장을 가거나 하면 겁이 났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었고 또 한쪽으론 엄마처럼 늙게 될까 봐 속을 태웠다. 엄마는 즐거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보여서. 나의 30대는 이 불안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다. 괴로우면서 두려운 상상을 멈출 수 없었는데 중요한 일은 느닷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없는 상황을 수없이 그려서 현실에 닥칠 일을 대비했다고 할까. 깊은 슬픔에 먼저 빠져보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계속해서 치렀다. 그래야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팔영산자연휴양림 주차장으로 내려갔어야 하는데 그냥 주차장 이정표만 보고 왔더니 정반대로 내려와 버렸어. 여기서 11km나 떨어져 있네. 더 걸었다간 죽을 것 같아."
"어머나 진짜, 어떡하지?"
"택시 좀 불러줘."
"아니 택시는 거기서 불러야지 목포에 있는 내가 부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