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변산 - 남편이 오른 100대 산
추운 날이었다. 여동생을 보여준다며 설렁탕집으로 불러냈다. 결혼 날을 잡아 놓고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꽤나 긴장되었다. 남자 친구는 촌스러웠다. 눈이 작게 보이는 두꺼운 안경을 썼고 더벅머리에 안쓰러울 정도로 말랐으며 옷도 입을 줄 몰랐다. 자기 몸에 들어가기 만하면 입는 것 같았다. 비슷한 느낌의 여자가 들어올 거라 생각하고 문쪽을 자꾸 돌아보았다. 예상한 모습의 사람은 우리 쪽으로 오지 않았다. 몸에 꼭 맞는 베이지 롱 코트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스타일이었다. 큰 키에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오른손으로 한쪽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걸어왔다. 지나갈 거라 생각하고 계속 문을 쳐다봤다. "오빠." 나는 남자친구와 그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자도 마르고 안경을 썼지만 도시 한복판의 여자처럼 세련됐다. 새 하얀 얼굴에 웃어 보일 때 입꼬리 바짝 보조개가 있다. 너무 예뻐서 기가 죽었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해 나도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설렁탕을 세 개 시켰다. 그리고 먹었다. 먹기만 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남매는 별로 가까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여러 질문을 받을 거라 생각하고 대비해 온 터였다. 쏟아지는 질문만큼 침묵 또한 곤욕이었다. 뚝배기를 싹 비우더니 "식장에서 봐요."라고 말하고 일어났다. 나의 아가씨가 될 사람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쉽지 않을 결혼 생활이 예상되어 애인에게 조금 신경질을 부렸다.
첫아이가 일곱 살 되었을 무렵 아가씨가 말했다. "언니가 지성이 놓고 나가면 내가 키우려고 마음먹었었어요."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다. "이쁘고 어리디 어린 여자가 결혼 생활이란 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거든. 더구나 우리 오빠랑. 세상이 그렇기도 하잖아요. 힘들이지 않고 사랑하고 또 그렇게 헤어지고." 이 말은 무척이나 감동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큰 위로는 없었다. 이유는 내가 없어도 내 아들을 보살펴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어서. 애기를 데려가면 데려갔지 놓고 나간다는 건 상상으로도 해 본 적이 없지만 고마웠다. 그 어려운 결혼 생활이란 해내고 있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아가씨는 내 아이가 셋이 되어 양팔로 다 끌어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자기 가정을 꾸렸다.
시간이 지났다. 나에게서 어리고 예뻤던 시절을 찾아낼 수 없듯 아가씨한테도 윤기 나는 긴 생머리와 잘록한 허리는 떠났다. 그리고 우리는 말이 많아졌다. 그 옛날 설렁탕 집에서 나누었던 조심이란 건 잘하지 않는다. 장날 장터의 푸짐한 아주머니처럼 우리는 만나면 말을 양껏 늘어놓는다. 결혼 생활이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 가득하지 않은가. 남편과 아가씨도 많이 비슷해졌다. 넓은 이마, 안경 속 더 진해진 쌍꺼풀, 새 부리 같은 뾰족한 윗입술, 넓어지는 볼테기. 급기야 산에 오르는 취미까지.
아가씨는 열다섯 개, 남편은 일곱 개의 100대 산에 올랐다. 연휴에 '변산'에 함께 오르기로 했다. 높지 않은 데라 나도 끼었다. 내소사 주차장이 꽉 찼다. 이 사람들이 산에 오른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나 내소사와 변산으로 나뉘는 갈림에서 99% 사람이 절로 갔다. 산길에 열 발쯤 땠을 때 나도 99% 안에 들었어야 하는 걸 깨달았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밖으로 나와 얼굴에 붙어 있는 듯했다. 너무 헉헉거려서 가슴 깊숙한 곳이 아팠다. 토를 하고 싶다. 난 여기까지라고 쌕쌕거리며 말했다. 아가씨는 저 앞이 능선이라며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저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었다. 한 발, 한 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시끄러웠고 '그만, 그만'이라는 단어만이 뇌를 채웠다. 그러다 느닷없이 정상이라고 했다. "언니, 언니 잘한다. 엉덩이도 뒤로 안 빠지고 자세 너무 좋은데. 나 언니 못 할 줄 알았어." 나도 그제야 웃어 보였다. "나를 쉬이 보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