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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첫 한라산, 그리고 남편의 재능

10. 한라산 - 남편이 오른 100대 산

by 황옹졸

없어야 한다면 남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애가 밤에 아무리 울어도 깨지 않았다. 나도 잠귀가 밝지 않은데 새끼의 작은 기척에는 눈이 떠졌다. 그 신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도 알아차렸다. 배가 고픈지 기저귀가 불편한지 어디가 아픈지. 또는 살이 닿길 원하는지. 젖을 찾을 땐 한 겨울에도 앞지락을 다 열어젖히고 가슴을 내주고 열이 나면 약을 먹여 포대기하고 밤새 집안을 서성거렸다. 사랑을 원할 땐 한없이 안아야 한다.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데 모든 걸 자연스럽게 해냈다. 아기를 낳자마자 엄마 모드가 장착이 되는데 남자는 좀 다른 걸까. 넷을 낳아 키웠다. 막내가 어느 쯤 크기까지 10년 넘는 시간을 복닥이는 밤을 보냈는데 아이들 아빠는 한 번도 수선한 밤중을 경험하지 않았다. 한 번도? 단정은 좀 그렇다. 기억이 완전할 순 없으니까. 몇 번은 일어났을 것이다. 기억은 안 나지만.


아이들은 엄마만 찾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똥구멍도 엄마한테만 닦으라고 했다. 적어도 한 명당 100번은 엄마를 불렀으니 4명이니까 하루에 400번. 차리라 처음부터 이름이 '엄마'였다며 좀 나았을까, '황엄마.' 엄마, 엄마, 엄마 소리에 몸에 조여진 나사가 풀리는 듯했다. 오늘처럼 찬바람이 선득하던 날, 무슨 연유에선지 아침에 우리는 고성을 내 싸웠다. 나는 낮 동안 아이들이 먹을 국과 반찬을 정성 들여 만들었다. 그리고 저녁에 이 사람이 퇴근을 해 오자마자 집을 나왔다. 좌표를 정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몸에 들러붙은 두툼한 각질 같은 것이 다 떨어져 홀가분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걸음은 무겁고 아직 여름이 아닌데 털갈이하는 병든 개처럼 몸뚱이가 춥고 초라했다. 뒤로 돌아 집으로 갔다. 현관을 열자 거실에 모여있던 열 개의 눈동자가 나로 향했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나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엄마를 크게 외치며. 진한 라면 냄새에 나에게 오지 않은 한 명을 쳐다봤다. 그는 물이 채워진 대접에 라면 면발을 담그고 있다. 해놓은 반찬에 밥도 먹이는 거냐며 울분을 토하며 아침처럼 소리를 질렀다. "있잖아, 사고라도 나서 우리 둘 중 한 사람만 살아야 한다면 자기가 죽는 게 좋겠어. 아직 애들한테 엄마가 더 필요한 것 같아." 배시시 웃으며 기꺼이 죽을 테니 걱정 말란다.



열 번째는 한라산이라고 했다. 막내를 데리고서. 백록담까지 가는 코스를 검색하니 편도 9.8km다. 컸어도 아직 초등학생인데 근 20km를 걷는 걸 아이가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더 큰 우려는 지친 중에 종일 이이가 아이를 잘 보살필지다. 딸에게 한라산은 진짜 어려운 데라고 누누이 설명했다. 듣지 않는다. 보니 산에 오르는 건 큰 관심이 없고 제주에 간다는, 비행기를 탄다는, 호텔 조식을 먹는다는 것에 들떠있다. 나는 남편을 붙잡고 행여 컨디션이 나쁘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절대 오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아침에 일찍 깨워 밥을 꼭 먹이고 오래 걸어야 하니 먹을 것을 넉넉히 챙기라고 몇 번이나 잔소리를 했다. 다 안다며 그만하라고 째려본다. 그래도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다. 이쪽 면, 아이를 챙기는 데 재능이 많이 부족하므로.


아침 8시 40분, 숲에서 밝은 얼굴을 한 둘의 사진이 왔다. 이제 오르기 시작했나 보다. 11시, 진달래밭 대피소에서는 시뻘게진 얼굴로 딸이 울고 있다. 12시 9분 백록담을 등지고 찍은 사진에서는 웃는지 우는지 분간이 안 된다. 한 시간 뒤 커다란 한라산 정상석 옆으로 다정히 서 다시 활짝 웃는다.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 연락이 왔다. '엄마'를 한 번 부르더니 막 운다.

"엄마, 엄마 보고 싶어. 살면서 이렇게 힘든 적은 처음이야. 지금 제주로 올 수 없겠지? 으아아아아. 아니 있잖아, 아침에 늦게 깨서 조식도 못 먹고 어젯밤에 남은 간식만 먹고 출발했거든. 냉장고에 있는 생수 꺼내서. 가다가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려고 했는데 편의점이 나와도 아빠가 안 들어가잖아. 왜 그러냐니까 좀 더 가서 들리자고, 편의점은 계속 나온다면서. 아니 그러다가 성판악 주차장에 도착해 버렸다니까. 나도 그때는 배가 안 고파서 심각하게 생각을 안 했어. 그리고 또 아빠가 시간을 잘못 계산해서 무지 서둘러. 아빠를 안 놓치려고 엄청 빨리 걸었어. 너무너무 힘들어도. 왜냐면 나 때문에 아빠가 100대 산 실패하면 안 되잖아. 진짜 죽을 것처럼 힘들어서 계속 울면서 올라갔잖아. 힘들어서 배 고픈 줄 몰랐는데 정상에 도착하니까 엄청 고픈 거야. 그래서 또 울고. 그랬더니 주변 어른들이 울지 말라고 마이쮸도 주고 귤도 주고 빵도 주고 하셨다. 창피해도 받았어. 먹었더니 좀 살 것 같더라고. 엄마, 컵라면 먹는 사람도 있어, 진짜 한 입만 달라하고 싶더라."


아이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 옛날 치밀었던 화가 다시 올라왔다. 이 사람이 진짜, 애를 거의 초주검을 만들어 놓다니. "그런데, 엄마 있잖아. 아빠가 엄마보다 훨씬 좋은 사람 같아. 내가 계속 울고 짜증 냈는데 한 번도 야단 안 치고 할 수 있다고 계속 응원해 주셨다니까. 아빠도 힘들었을 텐데. 그렇게 안 해 주었으면 아마 끝까지 못 올라갔을걸. 엄마는 막 신경질 냈을 거지? '그래서 엄마 말 들으랬잖아!' 이렇게 소리지르면서. 엄마 이제 나가야 해, 아빠가 샤부샤부 사준대. 나 오늘부터 아빠가 더 좋아. 히히. 내일 만나요!"


이제 이 사람의 재능이 발휘할 때가 왔나 보다. 10여 년 전 했던 말을 수정했다. "있잖아 자기야, 사고라도 나서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자기가 남는 게 좋겠어. 내가 죽을게."


그가 대답한다. "좋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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