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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틀어져야 맛이다

11. 내장산 - 남편이 오른 100대 산

by 황옹졸


새벽과 아침 사이.

울리는 핸드폰 알람 소리가 유난히 듣기 싫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본래부터 부지런히 몰두해 목표를 이루는 사람이었나?

아니다.


남편은 ‘산림청이 선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을 1년 안에 오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는 단 한마디 했다.

“제발.”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1년 안에 그걸 다 오른다는 건 무리 아닌가.

산이 전라도에만 있는 것도 아닌데.

남편은 다 계획이 있다며 웃었다.



이 사람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3, 4년 전부터 증상이 있었지만, 이쪽으로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밝고 낙천적인 남자다.

스트레스의 개념조차 모를 정도로.

단 한 번도 “힘들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결혼생활 동안 수많은 처지를 지나왔지만 그는 언제나 괜찮았고

항상 크게 웃었다.

심지어 의사 앞에서 조차,

“공기가 안 들어와서 곧 죽겠더라고요. 하하하.

그런데 안 죽었으니까 괜찮은 거죠?”라고 말하며 웃었다.


의사는 말했다.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었다고.


남편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일을 줄였다.

봉급도 줄었다.

그래도 다행히 직장에서 사정을 봐주었다.


사실 예전에 '일을 좀 쉴까?'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 힘들다고.


그때 나는 올원뱅크 앱을 켜 계좌 잔고를 디밀었다.

“살쪄서 그래. 배가 많이 나왔잖아. 다이어트가 답이야.”

무심히 말하고는 김치를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비염약 좀 빼먹지 마.”

그 말도 덧붙였다.


몽매한 아줌마다.


---


시동을 켜니 핸드폰 블루투스가 자동으로 연결됐다.

곧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문제가 생겼어.”


요즘 신께서 우리에게 자꾸 문제를 내신다.

피식 웃음이 났다. 어디 한 번 풀어볼까.

“뭔데?”


“산불조심기간이래.”


아, 산불.

그렇지. 가을은 산불을 조심해야 하는 때다.

보통 11월 1일부터 시작인데, 올해는 10월 20일로 앞당겨졌다고 한다.

이 시기는 산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 구간이 통제된다.

방장산도 못 오른다고.

11월 15일부터는 한 달간 겨울철 ‘산불방지기간’으로 완전 등산 금지다.

그리고 2월부터 5월까지는 봄철 ‘산불방지기간’.


등산 초보라 이런 걸 몰랐다.

남편은 코가 빠졌다.

“계획이 틀어졌어. 일 년 안에 다 오르려면 심각한 차질이야.”


나는 말했다.

“산불 아니라도 못 했을 거야.”

하여튼 사람이 부정적이라며 핀잔을 준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건 내가 심각하게 머리 싸매고 앉아 풀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니까.


---


계획은 틀어져야 맛이라고 위로해 본다.

나와 그에게.


수없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겪으며 계획의 무상을 알았다.

겸손이 아니라 대책이 없는 편에 가깝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살 뿐이다.

오늘 맡겨진 일을 하고, 오늘 허락된 걸 먹는다.


돌아보면 흑과 백처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쪽에서든 배울 있었으니까.

얻고 깨달은 건 나빴던 쪽이 더 많았으니

그걸 좋을 일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람의 병은 여전히 낯설다.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의 안으로 들어가

헤집고 다니며,

그 위에 올라 군림하고 싶었는지도.


이제는 산을 아끼고 보호하는 ‘산불조심기간’처럼,

그 사람 아래서 천천히, 찬찬히 올려다보기로 한다.

---



“그래서 집으로 올 거야?”

“아니. 가까운 내장산은 오를 수 있대.”

“자기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라고 하셨잖아.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알겠어. 그런데 그런 말 하기엔

들어놓은 보험이 좀 많은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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