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백암산 - 남편이 오른 100대 산
단톡방에 부고가 올라왔다. '정현호'의 아버지이자 '윤아라'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장례식장 위치와 발인이 날짜가 함께 적혀 있었다. 4년째 같은 공동체에 있지만 오가다 목례 정도만 했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참석했었다. 그때 식장에서 들려오던 말들-결혼이 늦었다느니, 이제야 한다느니- 를 듣고서야 부부가 나와 같은 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와 군살이 없는 몸이라 나보다 족히 다섯 살은 어려 보였다. 아마 오롯이 자기에게 집중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하루를 허덕이는 나는 부러웠다.
밤 열한 시 무렵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1층 엘리베이터 옆으로 부의금을 넣을 수 있는 높은 테이블이 있고 그 위 큰 스크린에는 고인의 사진과 이름, 아래로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 손녀의 순서로 떠 있었다. 그쪽으로 가 준비해 온 현금을 봉투에 넣었다. 몇 호실로 가야 할지 몰라 화면을 보며 '정현호'라는 이름을 찾았다. 각 호실 아들 이름 칸에서 정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지 보았다. 차례대로 여러 번 살펴도 '정현호'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장례식장을 잘못 온 건 아닌지 단톡방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 남편이 내 어깨를 툭친다. 찾았다면서. 2호실로 올라가자고 한다. 나는 잠깐 멈춰 2호실 상주 이름을 다시 훑었다. 거기 아들들의 성은 다 '홍'이다. 차례대로 홍의 네 아들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니 제일 마지막에 찾던 이름이 있다. 정현호. 홍춘길의 아들 정현호.
늦은 시간이라 빈소가 조용했다. 윤아라 씨가 우릴 알아보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결혼식 때처럼 여전히 곱다. 울었는지 눈두덩이가 벌겋고 흰자귀 혈관이 일어나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맞잡고 살짝 힘을 주었다. 이내 정현호 씨가 나타났는데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고 바르게 서질 못했다. 영정 사진 앞으로 가 국화를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눈을 떠 상주 쪽으로 몸을 트니 정현호 씨가 몸을 조금 비틀거리며 옆으로 선 중년 남자들을 형이라고 소개했다. 서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밤이 늦기도 했지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도 아니라 그대로 나오려는데 윤아라 씨가 과일이라도 드시고 떠나라고 팔을 살짝 잡는다. 창가에 붙은 테이블에 가 앉았다. '보람상조' 조끼를 입은 아주머니가 몇 가지 먹을 것을 내오시며 식사를 할 것이냐 물었다. 귤을 까먹고 있으니 윤아라 씨가 와 옆에 앉았다. 어색한 웃음이 오갔다. 얘길 나누는 일이 오늘 처음이니까. 남편이 먼저 입을 열어 아버님이 병환이 깊으셨냐고 물었다. 말을 받는 그녀는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사정을 말했다. 어느 집이나 겪는 흔한 사연이었다. 아프고 치매가 오고 요양병원으로 옮겨지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쩜 잔주름이 한 가닥도 없을까. 무슨 비결일지 궁금했지만 장례식장의 질문으론 옳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을 마쳤다. 다음 질문을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잘, 아니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잘'보다는 '어떻게'가 나은 것 같아 말을 한 번 멈칫했다. 이것도 좋은 질문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지내기는 상치르느라 힘들 것이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일상이 평안했는지 묻고 싶었으나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 병세가 깊어지면서 정현호 씨가 많이 힘들어했다고 했다. 그걸 보기가 좀 힘들었을 뿐 별다른 일 없이 지냈다고 했다. 아까 로비 화면에서 보았던 사연이 깊을 것 같은 이름이 생각났다. '홍춘길.'의 아들 '정현호.'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그려 보았다. 머릿속으로 하는 내밀한 작업은 꽤나 재미가 있어 잘 지낸다는 말 뒤에 길게 덧붙인 그녀의 근황은 거의 듣질 못했다. 말을 마치자 다 알아먹은 양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남편은 윤아라 씨에게 내일 발인까지 잘 마무리 하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차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정현호가 씨가 술을 많이 마신 이유는 그의 아버지 이름이 홍춘길인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지 않냐고. 이이는 왜 그런 쓸데없는 것이 궁금하냐며 한숨을 쉬 듯 '하여튼.'이라는 단어를 뱉었다. 그리고 백암산 최단코스나 검색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