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추월산 - 남편이 오른 100대 산
천명관, <고래>
'그녀에게 있어서 고통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소설을 다 읽어 가는데 저 문장이 나오는 거야. 책 읽다가 공감 가는 글귀를 보면 가슴이 뻐근하잖아. 그보다 더 진하게 문장이 평시 애쓰는 부분과 닮았을 땐 순간 멈칫, 좀 울까? 비슷한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감격스러워. 어쩌면 삶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들고.
어려서부터 변명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했어. 실수나 잘못 앞에서 많은 말은 불필요하게 느껴졌거든. 아홉 살 때쯤 일거야. 기껏 한 숙제를 동생이 다 찢어놔 버렸어. 뒷날 선생님께 맞았지. 숙제 안 했다고. 다섯 명이 나란히 섰는데 젤 끝이었어. 앞 애들이 매를 감하려고 사정을 늘어놓는데 길고 길어. 까닭이야 다 기구했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좋은 선생님이셨지만 친구도 선생님도 미웠어. 어서 맞고 일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오래도록 긴장하니까 심장이 조금씩 녹는 것 같아. 공책을 간수 못 한 내 탓도 상당한데 그런 걸 뭐 하러 구구절절 늘어놔. 동생을 데려와서 손바닥을 반반 맞을 수도 없잖아. 순전히 감당은 내가 해야 해. 선생님이 앞으로 오자마자 손바닥을 내밀었어. "잘못했습니다." 몇 번 해보니 이게 편해. 부딪히지 않아도 되니까. 관계에서 일방적인 건 없으니 저쪽 불찰이 많아도 억울할 것도 없지 뭐. 변명해야 할 일이 생기지 않게 날 더 단속하며 살게 되기도 하니 유익한 면도 있어. 익숙해지면 위의 문장에 나오는 그녀, 춘희처럼 돼. 모든 고통은 외부에서 오지 않아.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지. 춘희는 자기를 임신하게 하고 떠난 남자를 원망하지 않거든. 고통스럽지만 상대와 상관없는 내 문제. 멋지지 않니? 사실 소설의 춘희는 밖의 문제와 안의 고통을 연결할 줄 몰라. 태생적으로.
엊그제 그 자식이랑 얘기하다 언성을 높였어. 요즘 우리 둘 사이의 일이 매끄럽지 않아. 끝가지 가 봐야 결론을 알 수 있겠지만 과정이 지난해. 커지는 내 소리에 놀라 미안하다는 단어로 말을 내리고 내리고 방으로 들어갔어. 벽 앞에 서서 저 사람과 내 안의 요동을 연관 짓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면 힘을 내 안으로만 쏟아붓는 거야. 그런데 전 같지 않게 집중이 어려워. 이보다 더한 것도 능히 해냈는데. 이건 숙제처럼 혼자 들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잘 된 결과든 그렇지 않든 받아들이고 또다시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낯 부끄럽게 사랑이고 불러야 하는 건가. 당장 뛰쳐나가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싶어 미치겠더라. 일이 이렇게 된 데에 다 내 탓은 아니라고, 미안이라는 말 취소라고. 또 그가 하는 변명을 들어야 할 것 같았어. 그래서 했냐고? 아니.
보니 난 여태 감당한 게 아니라 피한 거였더라.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눈에서든 마음에서든 버려 버리면 되거든. 그러니까 탓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야. 사과를 안 받아도 되니까. 사는 게 단조로워서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거든. 부모도, 친구도, 선생도, 동료도. 웃지만 마음은 안 주는 거 알지? 그들이 변명 또는 설명 늘어놓기 전에 내 마음이 추월해서 떠나면 간단해. 나는 여태 이걸 책임으로 알고 살았거든. 그렇지, 이게 무슨 책임이야 도망이지. 이제는 다 내 잘못이라고 덮어쓰고 모든 관계를 끝내버릴 수가 없어. 사실 그러고 싶지 않게 됐어. 왜냐면 춘희의 마지막이 너무 쓸쓸했거든. 위대한 일을 하였지만 옆에 사람이 없어. 소설에서 말하진 않지만 춘희는 변명, 곧 설명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과도한 책임의식. 사는 방식을 바꾸는 게 좋겠어. 부끄럽고 서투른 변명을 많이 하고 많이 하는 쪽으로. 그래야 진짜 책임일 것 같아.
지금 그 자식이랑 싸우러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