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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평론 및 평점의 허와 실

by 이윤환 변호사

와인을 고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숫자다. 95, 94, 92…. 이 숫자들이 붙는 순간, 그 병은 어느새 ‘검증된 품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잔을 기울이는 순간 알게 된다. 그 숫자가 내 취향과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글은 평론가 평점이 왜 유용하면서도 동시에 불완전한 지표인지, 그리고 그 숫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짧은 생각이다.




숫자의 권위


keullojeueob-sa-eobga-hwag-in-keullib-bodeu.jpg 출처: freepik


평론가 평점은 본래 소비자에게 복잡한 정보를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였다.

한 번의 시음에서 느껴지는 향·산도·타닌·밸런스·여운·잠재력을 숫자로 요약한다.


100점제든 20점제든 소비자 입장에선 이해하기 쉽고, 유통·마케팅 입장에선 설득력이 있다. 숫자는 비교를 가능하게 하고, 선택을 빠르게 만든다.

바로 그 효율성 덕에 평점은 업계 공용어가 됐다.





객관화의 노력

eomji-songalag-eul-boyeojuneun-samusil-seong-gongjeog-in-sa-eob-ap-e-bijeuniseu-tim-seo.jpg 출처: freepik



평론가들은 대체로 일정한 기준을 세워 품질을 구조화한다.

블라인드 테이스팅, 표준화된 시트, 구간별 정의(예: 95점 이상은 ‘탁월’)가 그것이다.

이 과정은 분명 ‘객관화의 노력’이다.


같은 컨디션에서 같은 규범으로 평가하면 분산이 줄어들고, 연속성도 생긴다.

그래서 평점은 완전한 객관이 아니라 합의된 규칙에 기반한 상대적 객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로버트 파커


ledeu-waingwa-kaunteo-ba-e-byeong-ui-yuli.jpg 출처: freepik



로버트 파커가 도입한 100점 만점 시스템은 대중이 해당 점수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평가 체계이다.


로퍼트 파커는 기본 점수 50점을 우선 부여하고, 외관 5점, 향 15점, 맛 20점 및 장래성에 10점을 배분하여 100점 만점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전통적인 유럽의 평가는 20점 만점을 기준으로 부족한 부분만큼 점수를 제외하고 있다.


여기서 평가 점수는 해당 와인의 전반적인 퀄리티를 의미하고, 평가 방식은 가성비를 고려하지 않고 절대 평가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와인 평점 시스템은 개인의 취향보다는 절대적인 퀄리티를 우선한다.

그렇다보니 전문가들은 대개 결점의 유무로 와인을 평가하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점만 없으면 각 와인은 나름 마실만한 와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평가는 동일 카테고리 내 와인들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니, 즉 보르도 카테고리의 100점 와인과 호주 쉬라즈 카테고리의 100점 와인이 같은 퀄리티 수준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스코어 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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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입장에서는 대부분 와인의 평론가 점수가 85–95점대에 점수가 몰리는 ‘스코어 압축’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는 평점 92와 95의 3점 차가 잔에서 느껴지는 품질의 체감 차이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빈티지 특성·보관 상태·서빙 온도·디캔팅 시간·잔의 형태·마시는 이의 컨디션 같은 변수가 체감 품질을 더 크게 흔든다. 숫자 사이의 좁은 간극이 맛의 경험에서는 넓거나 반대로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주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객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취향은 여전히 중요하다. 어떤 평론가는 숙성에서 오는 오크의 향과 질감을 높이 평가하고, 어떤 평론가는 신선한 과실과 산도의 에너지에 마음을 연다.

와인의 ‘좋음’은 과학 실험의 측정값이 아니라 감각의 해석에 기대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100점제라도 기관·평론가마다 구간의 의미와 쓰임이 미묘하게 다르고, 그 미묘함이 점수의 표정과 문장을 바꾼다.

요약하자면, 평점은 취향을 표준화한 숫자다. 표준화되었기에 편리하지만, 취향이기에 절대적일 수는 없다.


일부에서는 로버트 파커가 늦게 수확한 포도를 사용하고, 산도가 낮으며, 오크 향이 강하면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와인을 선호한다면서 그의 평가 기준을 비판한다.

결국 평론가의 점수는 와인의 전반적인 품질을 기반으로 할 뿐, 개인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누구나 맛있다고 느끼는 기준이 아니다.

즉 맛에 대한 민감도를 정량화 할 수는 없다.




애호가의 선호와 ‘내 입맛 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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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가의 선호는 평론가의 선호만큼이나 강력하다. 누군가는 높은 산도와 미네랄을 사랑하고, 다른 누군가는 잘 익은 과실과 벨벳 타닌을 선호한다.

페어링도 중요하다.


결국 우리는 각 평론가에 대해 ‘내 입맛 보정치’를 갖게 된다.

예컨대 “A 평론가 94점은 내 기준 92점, B 평론가 91점은 내 혀에선 94점” 같은 식의 개인적 변환표.

이 보정치는 경험으로만 쌓인다.






평론가 평점을 유용하게 쓰는 법


huinsaeg-e-golib-doen-keullib-bodeue-mwonga-sseuneun-jebog-eul-ib-eun-jeolm-eun-jal-saeng-gin-namja-ibalsa.jpg 출처: freepik



점수의 의미구간을 먼저 읽자: 90–92, 93–95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기관별 정의를 확인하자.

테이스팅 노트와 조건을 같이 보자: 언제, 어떤 맥락에서 시음했는지. 블라인드 여부, 배럴 시음인지, 병입 후인지.

평론가의 취향 성향을 학습하자: 누구는 오크·농밀, 누구는 프레시·미네랄에 가산점을 준다.

내 입맛 보정치를 기록하자: 실제 시음 후 “나와의 오차”를 메모해 두면 다음 선택이 훨씬 정확해진다.

가격과 용도를 분리하자: 선물용, 셀러링, 캐주얼 디너용 등 목적별로 ‘충분히 좋은’ 기준은 다르다.





점수는 지도, 경험은 현장


leogsyeoli-leseutolang-eseo-jeomsim-eul-meogneun-tab-byu-chingudeul.jpg 출처: freepik



평론가 평점은 분명 유용하다. 방대한 시장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최소한의 지도다. 그러나 지도는 지형 그 자체가 아니다. 산의 바람, 토양의 냄새, 잔에서 피어오르는 향과 혀끝의 미세한 떨림은 지도에 다 담기지 않는다.


평점이 객관을 가장하고 있을 때조차, 그 속에는 누군가의 취향과 시대의 경향, 시장의 인센티브가 얽혀 있다. 그러니 숫자를 존중하되, 숫자에 복종하지 말자.

읽어야 할 것은 점수가 아니라 맥락, 믿어야 할 것은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혀다.


결국 좋은 와인이란 높은 점수의 와인이 아니라,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의 음식과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더 맛있는 와인이다. 숫자는 그 자리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표지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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