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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들꽃(野花)_1부

▶ 살아, 악착같이!

by 방현일


**

“너, 들꽃의 꽃말이 뭔지 아니?”


그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내 눈앞으로 바람에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보리 물결 속에 머리를 파묻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글쎄요. 죽음이 아닐까요….”


‘삐~’

‘덜컹’


벌써 막차는 떠나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무거운 걸음을 안고 서울역 광장에 섰다. 내가 현준 씨를 안 것은 대학교 이 학년 때였다. 실습실 현관 유리문 틈으로 비친 하얀 얼굴에 눈부신 눈동자를 내 가슴으로 끌어당겼을 때이다. 오래전의 일이다.


*

‘드르륵’


계속해서 바늘이 부러졌다. 엷은 하늘색의 실습실 내부에는 정원 사십 명이 각자 제 위치에서 과제물 때문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월인데도 날씨는 한여름 같았다. 신입생 때는 놀러 다니느라 바빴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취업 문제로 데이트도 미루고 야간까지 꼼작 않고 실습에 매진했다. 이제 겨우 이 학년인데 삼, 사 학년 선배님들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선배님들은 우리 이 학년들이 독종만 모였다고 한다. 나는 의상학과를 택하면서 단시간 내에 브랜드 옷을 만들겠다는 야무진 포부에 들떠 있었다. 이론도 열심히 하고 실습도 열심히 했었다. 그러나 이 일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하얀 종이에 디자인을 그려 나가며 각자로 재보고 곡선자로 맞춰보고 패턴만 하는데 꼬박 일 년이 넘게 걸렸다. 친구들과 틈틈이 포트폴리오를 제작하면서 연예인 얼굴에 옷을 맞춰 그렸다. 그러면서 백마 타고 오는 왕자의 꿈도 꾸었다. 그 꿈이 이뤄진 것이다. 비록 내 옆에 있는 유정이의 친구였지만, 그의 눈동자가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땐 나는 눈짓으로 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조금만 기다려 곧 나갈게.’하고. 그는 매일 왔다. 그러나 유정이는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독한 계집애’, 그가 오면 웃지도 않았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친구들에게 “나, 화장실 갔다 올 게.” 하면서 부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문을 살짝 열었다.


**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딸각.’

“예. 최 성미입니다. 지금은 외출 중이오니 잠시 후, 삐~ 소리가 나면 녹음해 주세요.”

‘삐~’

“어미다, 전화받아라.”


나는 소주병을 손으로 밀고 잡지를 잡아당겨 그 속에 있는 전화기를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엄마, 웬일이에요.”

“전화 좀 하고 살아, 민수가 울고불고 지애미 찾다가 잠들고 하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다. 게다가 어제는 몸이 불덩이 같아서 보건소에 데리고 갔다 왔어, 너 듣고 있니? 언제까지 민수 여기다 맡길 셈이야. 네 아빠한테도 미안하고 동네 사람 볼 면목도 없다.”

“동네 사람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래 언제 내려올 거니.”

“엄만 알잖아 나, 이 일 내려가서는 못해.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


‘휴~우~.’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민수가 보고 싶었다. 민수는 현준 씨를 꼭 빼닮았다. 하얀 얼굴에 맑은 눈동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슬픔이 밀려왔다. 나는 민수를 보다가 “엄마!”하고 밝게 웃는 모습에 아이를 떠다밀었다. 그래도 아이는 “엄마 잘못했어요.” 하면서 내 품에 안기었다. 그런 민수를 더 이상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엄마만이 민수가 누구 앤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계신다. 엄마에게 미안하다며 현준 씨의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 엄마는 너무나 묵묵히 받아 주셨다. 엄마는 내가 마지막 얘기를 하려고 할 때 잠시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다 눈물을 닦으시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수술대에 올랐다. 여러 번의 진통 끝에 민수를 낳았다. 엄마는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셨다. 엄마가 “수고했어.”라는 말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기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다. 나는 민수를 안고 유정이의 집에 쳐들어가고 싶었다. 유정이에게 ‘보라고 현준 씨의 아들이라고’ 유정이는 현준 씨와 결혼했는데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 유정이는 대학교 사 학년 때 현준 씨와 결혼했다. 나는 결혼 소식을 현준 씨에게 들었다. 회사의 연수생으로 바쁘게 일을 하는 나에게 현준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처럼 신나게 내게 전했었다.


“나, 유정이와 결혼해.”


결혼식은 화려했다. 하객들도 많았고 예식장의 장식들도 꽃들도 아름다웠다. 그래도 그중에서 유정이가 가장 아름다웠다. 현준 씨는 나의 눈을 여러 번 보았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눈빛이었다.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었다.


*

나는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가볍게 문을 밀고 나갔다. 벽 쪽에 기대고 서있는 그는 살랑거리는 가벼운 셔츠에 파란 청바지 그리고 갈색 운동화에 유난히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릿결은 윤기가 났다.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고개를 약간 떨구고 있었다.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용기를 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숨소리는 엄마의 팔베개에서 편히 자는 아이의 숨소리 같았다.


“안녕하세요? 전 최성미예요. 유정이하고 친구고요. 유정이 옆에 앉아 있어요. 저희는 지금 블라우스를 만듭니다.”


말투가 너무 어색했다. 그런 얘기까지 왜 했는지 우스웠다. 블라우스를 만들든 스커트를 만들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저 유정이 좀 잠깐 볼 수 없을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는 황급히 실습실 안으로 들어갔고 유정이에게 다가가서 말하려다 아예 유정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유정이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고 그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하는 그의 말에 유정이는 울며 그의 품에 안겼다. 나는 속으로 유치한 삼류 소설 같다면서도 내심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실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여학교라서 남자도 볼 수 없을뿐더러 완벽하게 생긴 그에게 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정이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들을 보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라고 어깨에 메고 온 기타를 쳐주며 음료수도 권했다. 나는 유정이의 눈치를 살피며 기타 소리에 발을 맞추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피로연장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음날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다른 연수생들보다 한 시간은 일찍 와서 사무실을 정리하고 유리창을 닦았다. 어깨와 가슴 사이로 땀이 흘러내렸다. 이름을 몇 번 불렀다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최성미 씨, 일찍 오셨네요.”


디자인 실장이었다. 깔끔한 외모에 넓은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이 시원스레 보였다.


“장 실장님도 일찍 나오셨네요.”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 일에만 매달렸다. 유정이와 현준 씨는 졸업식장에 오지 않았다. 유정이는 졸업식을 한 달 남기고 현준 씨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현준 씨가 외국 지사로 발령 났기 때문이라는데 디자인 공부하기에는 프랑스만큼 좋은 곳도 없었다. 괜히 심술이 났다. 나는 장 실장이 맘에 들었다. 다정다감한 그의 태도에 마음이 조금씩 동요되기 시작했다. 사건은 회식장 이후에 일어났다. 회식을 끝내고 유난히 술을 많이 마신 나는 가눌 수 없는 몸을 장 실장에게 맡겼다. 사실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내 몸이 반쯤 벗겨진 상태에서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친 누런 동물이 나의 몸을 덮칠 때 순간적으로 그것을 밀쳐 버리고 옷을 입는 둥 하며 서둘러 여관을 나왔다. 계속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이 년 후, 나는 다른 디자인 회사에서 박영길이라는 실장과 결혼했다. 그 새낀, 그 사람은 처자식이 있었다. 한심스러운 내 몸을 끌고 시골로 내려왔을 때 엄마는 나를 안고 눈물을 흘리셨고 아버지께서는 역정을 내시다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못났기 때문이라며 가슴 아파하셨다. 나는 일주일 만에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기 전날 밤, 시골 야산에 올랐다. 산은 넓고 평온했다. 나무들과 꽃들이 나를 반기는 듯 살랑거렸다. 나는 내 발밑에 있는 꽃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한 번 밟힌 꽃은 일어나지 못했다.


- 1부, 끝 -


▶ 1부 * 오래전 과거, ** 과거입니다. 2부 ** 과거, *** 현재입니다.


▶ 野花(야화) 들꽃. 하층(下層) 사회나 화류계 미녀(美女)의 비유.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Image by dae jeung kim from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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