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년 만이다. 원래는 한 해 두 번은 만나기로 했었다. 모든 삶이 그러하듯 우리도 바빴는지 서로의 안부만 묻다 이제 만난다. 좋은 사람은 가끔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친숙하고 반갑다. 삶이 바쁘더라도 서로를 생각해 왔다는 의미다.
전국에서 한자리로 모여야 하는 만큼 교통의 중심 ‘대전’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한 한 달 전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소풍과 수학여행을 애타게 기다렸던 초등학생 마음과 같았다. 그동안 쌓였던 많은 얘기를 풀어놓을 순간. 그날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2023년 12월 17일 일요일. 친절한 알람음에 강제 기상했다. 아내와 아들이 깰까 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불빛을 찾아 벽을 더듬었다. 대충 씻고 날씨 앱을 봤다. 기온은 영하 15도다. 갑자기 찾아온 한파로 가장 따뜻한 외투를 꺼냈다. 더위에도 약한데 추위는 더 질색이다. 서울역에서 8시 50분 KTX 열차에 승차해야 했다. 집에서 서울역까지 전철로만 1시간이 걸린다. 선물을 챙기고 집을 나와 찬 공기를 들이켰다. 폐까지 박히는 찬 기운에 따뜻한 이불 생각이 간절했다.
전철역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출근을 서두르는 직장인이 없는 그 길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좋은 분들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 열차에 내 몸을 맡겼다. 나에게 대전은 전라도, 경상도를 갈 때 고속도로 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곳일 뿐이었다. 처음 가보는 대전은 궁금한 도시 그 자체였다.
30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 많은 친구들이 대전 엑스포를 방문했다. 당시 우리 집 형편은 어려웠다. 부모님께서 데리고 가지 못함을 미안해하실까 봐 나와 누나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TV로 엑스포를 보고, 다녀온 친구들의 후기를 들으며 위안을 삼았다. 그래서 이번 대전 방문이 어린 시절 아쉬움을 날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가볼 만한 곳이 별로 없다 해서 현재 대전은 ‘노잼 도시’로 불린다. 가는 동안 대전 명소와 맛집을 검색하며, ‘유잼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혼자 애썼다. 여행의 참맛은 무계획이지만, 지도 앱을 보며 역 근처 도보로 이동할 만한 곳부터 탐색했다. 대전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설렘에 심박수도 널뛰기 시작했다.
처음 가본 장소에 내딛는 첫발은 항상 신난다. 승강장에서 대합실로 이동해 만나기로 한 분들. 캐나다 팀을 기다렸다. 이름만 캐나다 팀이지 모두 한국인이다. 캐나다 팀은 2019년과 2021년에 통합체육수업 우수 사례자로 선발된 교사 모임이다. 초등 교사, 초등 특수교사, 중등 체육교사, 중등 특수교사 10명으로 구성됐다. 통합수업은 장애-비장애 학생들이 함께 비슷한 수준에서 수업받는 환경을 말한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거다. 우리는 작년 11월 캐나다에서 6박 8일간 소중한 시간을 함께 나눴고, 현재는 그 인연을 겹겹이 쌓아가고 있다.
저 멀리서 누군가 밝게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가장 특이한 이력을 갖고 계신 특수 선생님이시다. 이분은 원래 체육교사였다. 체육을 가르치며 나와 비슷한 이유로 장애 학생에 관심이 생기셨다고 한다. 그것부터가 특이했다. 장애 학생에 관심을 갖는 일반 교과 교사는 극히 드물다. 나 같은 유별난 교사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에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동료 교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체육교사를 할 때 100% 만족했었는데, 특수교사를 하니 200% 만족하며 산다.’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됐다. 특수교사로서 만족도가 200% 라면 어떤 점이 좋으신 걸까. 선생님 속마음이 더 궁금해졌다. 다음에 만나면 선생님께 자세한 얘기를 더 들어봐야겠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어딜 가나 지각쟁이는 항상 있다. 약속에 지각쟁이가 빠지면 ‘앙꼬 없는 단팥빵’이 돼버린다. 먹음직스러운 단팥빵을 만들기 위해 총무님이 앙꼬를 자처했나 보다. 총무님의 큰 그림이었다. 이분도 특수교사인데 체육학 박사과정 중이시다. 통합체육수업 하는 체육교사가 신기하셨는지 나를 연구하신다. 그래서 내가 말할 때면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셨다. 발상의 전환인가? 선생님은 대학원에서 일반 체육학을 전공해 통합수업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연구하고 계신다.
먼저 모인 4명이 대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강추위에 아침을 굶어서인지 따뜻한 국밥 생각이 났다. 역 앞에 대전중앙시장이 있었고 추위를 피해 근처 국밥집에 들어갔다. 보통 식당에서 여러 메뉴를 시키면 단일 메뉴를 시킨 시간보다 늦게 나온다. 친구 중에 자기 혼자 다른 거 먹겠다고 말하는 놈이 꼭 있다. 그러면 우린 그놈에게 밥 대신 욕을 한 무더기 먹이며 정신교육을 한다. 역시 캐나다 팀은 하나였다. 다 같이 ‘소머리국밥’ 단일 메뉴를 외친다. 밥을 먹는 건지, 말만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수다를 떨었다. 따끈따끈한 최근 사연이 왜 이렇게 공감이 되는지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렇다. 우리는 교사였다. 서로의 거리가 멀어도 학교 내 세상사는 너무도 닮아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가 궁금했다. 은행나무 거리? 옛 시골의 지명이라고 하는데 젊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손꼽으라 하면 단연 ‘성0당’이다. 그곳에 가기 위해 대전을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 본점 앞은 이미 ‘오픈런’으로 인산인해다. 나는 맛집 줄 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줄 서기 행렬이 보이면 그대로 지나친다. 그런데 줄 서기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니 사람 마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기 줄이 길어 다른 카페로 이동했다. 언 몸을 녹여줄 따뜻한 커피와 케이크 몇 조각을 결재하고 분위기 좋은 자리에 앉았다. 진한 커피 향과 케이크 달콤함에 내 몸도 사르르 녹았다. 마침 대전에 사시는 선생님이 도착하셨다. 완전체가 되는 순간이다. 이 분은 꼼꼼하시고 사람을 잘 챙기신다. 며칠 전부터 걱정이 되셨는지 일찍 도착하는 선생님들을 위해 갈만한 곳을 미리 알려주셨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얼른 선생님 차에 몸을 실었다.
본격적인 대전 탐방이 시작됐다. 대전 시내는 탁 트인 공간과 폭넓은 도로가 인상적이었다. 한적함에 여유로움까지 느껴진다. 복잡한 수도권에 사는 나로서는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이다. 작년 11월 선생님들과 해외연수 갔던 캐나다의 ‘위니펙’ 같았다.(위니펙은 다음 글에서 다뤄보겠다.)
최종 목적지는 30년 만에 가보는 대전 엑스포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을 강산이 세 번 바뀐 뒤에야 다다랐다. TV로만 봤던 한빛탑과 꿈돌이가 나를 반겼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꿈돌이, 내가 올 때까지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30년 전 꿈돌이와 현재 모습은 변함없어 보였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어서 그런지 미래 건축물처럼 세련되고 높아 보였던 한빛탑은 작게 느껴졌다.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매표소를 찾아봤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긴 무료 관람이에요.’ 방문객을 배려하는 대전시와 꿈돌이가 나에게 주는 깜짝 선물 같았다. 전망대에 올라 대전을 한눈에 내려다봤다. 해 질 녘 붉게 물든 대전 시내, 그리고 엑스포다리 강변 물결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멋진 야경까지 눈에 담고 서울행 열차를 타기 위해 다시 대전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전에 사시는 선생님은 우리를 빈손으로 보낼 순 없으셨는지, 기어이 성0당에 데려가셔서 롤케이크까지 사주셨다. 선생님들과 헤어지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우리는 곧 만난다. 나는 2024년 1월 8일부터 12일까지 5일간 이천선수촌에서 전국 체육교사, 특수교사, 초등 교사 200명을 대상으로 통합체육수업 강의를 한다. 이때 캐나다 팀도 같은 공간에서 워크숍을 실시한다. 그곳에서 만들어질 멋진 이야기를 기대하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열차에 올랐다.
누가 그랬던가? 대전이 노잼 도시라고. 나에겐 멋진 분들과 꿈돌이가 반겨주는 ‘핵꿀잼’ 도시였다. 그곳이 더 궁금해졌기에 다음엔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들과 함께 방문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