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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장과 마음그릇]

[읽고 쓰는 삶 273일 차] 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by 윤서린

책에서 찾은 빛나는 문장


모든 그릇들에는 작은 세계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어 있다.
그릇을 만들 때 우리는 그 소리들도 같이 만든다.
또는 우리가 그릇을 만드는 동안 그릇은 그 소리들을 만든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무겁게 가라앉은 식탁의 침묵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고 끼어든다.
이제 막 돌아서서 헤어지는 연인들 사이에 마침표를 찍듯이 ‘딸깍’ 찻잔 내려놓는 소리로 끼어든다.
그것들은 절대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지만 모든 것에 반응한다. 무관심에는 무관심으로, 분노에는 분노로 슬픔에는 슬픔으로 응답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릇으로 사용하지만 그것들은 자신들이 악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릇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악기의 삶을 사는 것은 그들의 일이다.

_ 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20-21면


윤서린의 마음으로 쓰는 문장


[찬장과 마음그릇]


찬장 가득히 크고 무거운 그릇들이 있다.

그릇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과 두툼한 질감에는 안정감이 숨어있다.

그들에게는 얇은 그릇에서 느끼기 어려운 든든함이 있다.

음식의 온도를 오래 지켜주고 커다란 존재감으로 식탁을 압도하는 믿음직스러움.

그와 반대로 나를 유혹하는 얇고 예쁜 그릇.

가벼운 무게로 내 손목을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 날렵한 그릇의 날개는 음식을 산뜻하게 담아낸다.

보통 온도 유지와 상관없는 과일이나 디저트가 얇은 그릇의 주된 고객이다.


내 마음에도 찬장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여려 종류의 마음그릇들이 쌓여있다.

찬장을 열어 어느 그릇을 꺼내 음식을 담을까 고민하게 되는 순간처럼, 누구를 만나러 나가는지에 따라 준비해야 할 마음그릇이 있는 것이다.

털털하고 자유로운 상대를 만날 때는 그의 투박함에 쉬 깨지지 않을 두툼한 마음 그릇을 준비한다.

마구 퍼담아주는 정을 담으려면 크기도 커야 한다.

반대로 섬세한 상대를 만날 때는 내 마음그릇 중에 그와 어울리는 무늬의 예쁜 그릇을 챙긴다.

그의 아름다운 언어와 행동들을 잘 모아서 디저트처럼 내 마음그릇에 담고 싶어서다. 만남 후 집으로 돌아와 다음 만남까지 그 느낌을 조금씩 아껴 먹는다.


이것저것 가득 채웠던 마음그릇에 소화되지 못하고 남은 감정의 부스러기들은 깨끗이 씻어 잘 말려둔다. 또 다른 만남을 위해 가지런히 정돈된 나의 찬장 속 마음그릇들.

오늘도 무엇을 마음그릇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삶의 젓가락을 들어본다.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깨지기 쉽지만 아름다운 그런 관계들과의 채움과 비움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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