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삶 274일 차] 한정원 <시와 산책>
저녁에는 묵독보다 낭독이 좋다. 내 입술 사이에서 나온 검은 글자들이 새처럼 어둑하게 날아가는 상상을 하며, 나는 시와 저녁이 잘 어울리는 반려라고 느낀다.
모호함과 모호함, 낯설음과 낯설음, 휘발과 휘발의 만남.
_ 한정원 <시와 산책> 124면
책에서 찾은 문장들의 영혼은 오늘도 내 몸을 구석구석 여행한다.
책을 읽다 보면 눈으로 읽은 문장을 입안에 가뒀다 손끝으로 뱉고 싶을 때가 있다.
눈으로 읽고, 입술로 읽던 문장들이 어느새 내 안의 곳곳을 돌아다니다 뜨거운 혀 안에 옹기종기 모인다. 혀 위에 올라간 단어들은 일렬종대로 줄을 맞춘 채 종종걸음을 하다가 누가 떠밀기라도 하듯이 순식간에 치열과 입술을 뚫고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마치 급 브레이크를 밟은 기차처럼 다음 단어가 앞 단어를 또 그 앞 단어를 사정없이 밀어붙인다. 그렇게 순식간에 서로가 서로를 밀치고 제자리를 채간다. 결국 엉키고 걸려 넘어진 문장들은 하나로 완성되기 전에 목적지를 잃은 채 전복된다. 경로를 이탈한다.
다급해진 혀는 굴러 떨어지는 단어들을 미세한 호흡으로 엮어낸다. 책 속의 문장들은 처마 아래 거미줄처럼 아랫입술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이때, 보다 못한 작가의 영혼이 책 속에서 손을 뻗어 입술 끝에 매달린 문장들을 그네처럼 힘껏 밀어준다.
겨우 도움 닿기 한 문장들은 있는 힘껏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며 폭죽처럼 터진다. 자신을 태워 여러 빛을 뿜어내는 단어들과 소멸하는 문장.
흩어진 몇몇의 단어들은 도로 입술 안으로 숨어 들어가기도 한다. 몇 개는 운 좋게 귓가에 안착하기도 하며 미처 식지 않고 열을 뿜는 몇몇 단어는 내 가슴 위에 콕하고 곤두박질쳐 깊이 박혀버린다. 그렇게 가슴 안에 파고든 단어들은 불똥이 튄 것처럼 화끈거리다 지워지지 않는 작은 흉터를 남긴다. 그런 흉터가 쌓이고 쌓여서 내 안의 어떤 무늬가 되면 나는 아무도 없는 밤에 조용히 그 무늬를 점자책처럼 더듬는다.
손끝 피부에 스며드는 오돌토돌한 문장들, 나는 그 문장들을 다시 뜨거운 혀 위에 모아놓고 살며시 입술을 연다. 그러면 그 문장들은 주저주저하면서 내 열손가락 끝에 올라탄다. 마치 시소놀이하듯이 힘주어 뛰어오르고 굴러 떨어지며 어떤 문장들을 만든다.
이렇게 엉뚱하고 이상한 문장을.
글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열 손가락 끝에 매달려 아우성친다.
그것들은 나의 혀끝에서 태어나서 손끝에서 소멸하기도 새롭게 부활하기도한다. 이렇게 아무도 쓰지 않는 작은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