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워킹홀리데이
‘가진 것 하나 없이. 배운 것 하나 없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꿈에 그리던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어깨가 욱신거리고 팔목에 통증이 있다. 2년을 버틸 수 있을까.
귀국 후 스타벅스 코리아 본사에 취업하는 상상을 하며, 영국 스타벅스에서 커피 내리는 일을 벼슬처럼 여겼다. 또래 친구들만 봐도 곧바로 취업하거나 집안의 여유가 되면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워킹홀리데이 2기로 갔지만 1기들과 비슷한 시기에 일자리를 구했고 그들 역시 선배들이 없었기 때문에 취업에 난항을 겪었다. 다들 힘들었다. 지금은 런던 스타벅스에서 월급 받는 일이 쉬워지고 더 나은 일자리도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타벅스는 세계적인 기업이다. 런던 1존에 있어 추가 시급이 붙었고 하루 5시간에서 최대 8시간씩 주 3일 일해도 집세와 교통비, 식비는 쉽게 충당할 수 있었다. 물론 여행을 좋아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이었다면 마트 아르바이트를 6개월 뛰고 그만둬야지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다면, 영국 스타벅스는 ‘시간제 바리스타’들도 매년 2주간의 유급 휴가를 제공했다.
‘일개미였던 나’는 정규직 계약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꿈인지 생신지! 오매불방 정규직을 향해 달렸던 3주라는 시간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수십 개의 스타벅스 매장을 돌고 인사하며 또 고개 숙이며 나와야 했던 숱한 시간이 있었다. 수치와 욕을 감당했던 앞선 시간이 있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런던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필요에 의해서 일어났고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에 발을 내딛는 올바른 과정이었다.
드디어 런던에 친구들이 생겼다. 영국인 ‘막스’는 나보다 어리면서 껄렁껄렁하게 힙합식으로 인사한다. ‘바네사’와 ‘알베르토’도 나와 눈을 마주치고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간다. ‘도로타’는 늘 그랬듯 온화한 미소로 엄마처럼 무척 든든한 존재다. 일본인은 슈퍼바이저 일을 했는데 가끔 마주쳐서 내가 억지로 말을 붙여야 했다. 미얀마인과는 겹치는 시간대가 없어 자주 볼 수 없었다. 인도인도 미얀마인과 마찬가지였고, 브라질인은 이상하게 정이 안 갔다.
어느 날은 무뚝뚝함이 흐르는 키 작은 인도 남자애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경혜, 너 브라질 슈퍼바이저 어떻게 생각해?”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지금 브라질 슈퍼바이저 때문에 그만둘 판이야. “
”뭐라고?“
“자꾸 힘든 일만 시키고 강압적이잖아. 맞지?”
“...(끄덕끄덕)”
그렇게 우리는 합심하여 브라질인을 밀어내기로 했다. 그녀와 일할 때 궂은 일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평소에 말이 많던 친구들도 하나같이 벙어리가 된 듯 조용해졌고 미간을 찌푸리고 고객을 맞이해야 했다. 돌이켜보니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와 인도애는 종종 말다툼을 했다. 언성이 높아져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다. 모두 돌아가며 하는 일을 바리스타에게만 반복적으로 떠맡긴 것이다. 그제야 묵묵히 일하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Bully야.“
”Bully?“
”모르겠으면 뜻 한 번 찾아봐.“
초록색 창에 'Bully'를 찾으니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나왔다. 다들 그녀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니저도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경혜, 너에게도 명령하고 강압적이었어?”
매니저가 나에게 처음으로 인간적인 질문을 했다.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미소를 감추며 대답했다.
“응 맞아. 그녀랑 일하면 항상 무거운 것을 들고 청소만 죽어라 했어.”
매니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알레’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만, 브라질에서 온 슈퍼바이저가 내뱉는 말은 부당했다. <등이 굽을 때로 굽은 매니저와 살이 붙을 대로 붙은 슈퍼바이저의 차이> 어떤 포지션이든 돌아가며 일을 하고 팀을 이루며 협력함으로써 완벽을 이뤄내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하기 싫은 일은 남들도 하기 힘든 일이다. 그 일을 특정 직원들만 도맡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 깊이가 달랐다. 참다못해 폭발했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를 바랐다.
지역 매니저가 직접 와서 상황을 살펴볼 만큼 심각한 문제였는데, 그 사람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갑처럼 행동하는 일이 당연했던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사직서를 냈고, 우리는 다시 매장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 들었던 얘기지만 그녀는 매장 건너편에 있는 H&M에서 매니저를 한다고. 분명 이력만 보고 그녀를 뽑았을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