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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이 사라진 시간. 그리고 다시 한번

동굴 속 이야기 서른둘

by 히키코모리 K선생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했던 책들은 어느 날 소각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잃는 것이 죽음과 닮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삼국지 전집을 선물 받았다. 먹으로 휘갈긴 힘 있는 그림에 난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지고 마는 인물들에 빠져들었다. 난 그들의 끝을 읽었지만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장면, 실패를 딛고 나아가는 장면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들의 의기와 꺾여진 꿈을 또 한 번 응원했다.


놀이거리가 없던 어린이에게 삼국지는 언제고 도파민을 분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한가할 때면 삼국지를 읽었다. 라면받침으로 쓰다가도 펼쳐 읽고 베개로 사용하다가 읽고 모기를 때려잡으려고 던진 뒤에 펼쳐 읽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책은 뜯어지고 헤어지고 온갖 기름때 물때 손때 콧물 침에 낙서 가득한 책이 되어 있었다. 나에겐 보물이었던 책은 폐지뭉치와 닮은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저분한 책은 매일같이 방바닥과 이불에서 굴러다녔고 어머니는 그것을 싫어하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책들이 모두 사라졌다. 어머니는 폐지뭉치를 소각장에 버리셨다. 울면서 소각장에서 매캐한 플라스틱 냄새를 맡으며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이미 모두 재로 타버린 뒤였다.


수많은 인마와 창의 숲을 헤쳐 나오는 조운이 그려진 두 페이지의 장판파 그림이 있었다. 난 그 페이지를 펼칠 때면 매번 전율에 몸을 떨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용맹한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꾸던 강렬한 감동의 시간은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잃는 것이 죽음과 닮았다는 것을 그 소각장에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많은 것을 좋아했다. 매일 좋아하는 것이 늘어났다. 오늘은 좋아하는 것이 늘어난 하루였고 내일은 좋아하는 것이 또 하나 늘어날 두근거리는 하루, 기대에 찬 하루였다.


좋아하는 것이 늘어나는 만큼 좋아하던 것들을 잃어갔다. 우연한 사고로 놓치게 되는 것도 있었고, 해야 할 일이 늘어나고 점차 잊혀져 나도 모르는 새 내 손에서 떠나버린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이 멈추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좋아하는 것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것, 놓치게 된 것을 다시 좋아하게 되는 일은 적었고 현실과 어긋나는 것들은 놓거나 포기했다. 기대에 찬 내일과 내년은 좋아하는 것들이 사라질 시간이 되었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갈 미래가 되고 말았다.

인생을 함께 한 요트를 놓아버리게 되던 어느 날 - 영화 <ALL IS LOST, 2013>


히키코모리가 되고 우울증이 중증으로 발전하면서 좋아하는 것은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혐오하는 쾌락들 몇 가지가 남았을 뿐 좋아하는 것은 모조리 놓아버리거나 포기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삶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져도 살아있는 시간이 멈춰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검회색으로 덮인 시간일 뿐이었다. 팬더믹으로 시체가 도시를 가득 메우는 사건이 벌어진 어느날 조차 나에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던 1년 전 여느 평범한 하루와 다름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이 사라진 시간은 죽음 그 자체와 다름이 없었다.




2024년. 히키코모리에서 탈출한 지금은 좋아하는 감정을 회복했다. Spotify에 좋아하는 음악을 하나씩 추가하고 arxiv에서 좋아하는 주제의 논문들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놓았던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들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만남도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죽음이 저 멀리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을 뜨겁게 달굴 만큼의 좋아하는 감정은 솟아나질 않는다. 펄떡이질 않는다. 열정이 없다. 타버리고 남은 장작마냥 뜨뜻미지근하다. 적당히 좋다.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내년은 상실하면 죽고 싶은 기분이 들 만큼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고 싶다. 그리고 그것에 온 힘을 쏟고 싶다. 예전처럼. 그렇게 진정으로 살아가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다시 한번.


- 영화 <ALL IS LOST>를 보았다. 12월 31일에 보기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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