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4월 어느 날의 꿈 일기
'심장 블루투스'
- 24년 4월 어느 날의 꿈 일기-
꿈속에서 난 대략 15년 전쯤인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놀거나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무난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Skins라는 퇴폐적이고 여러모로 쇼킹한 영국 하이틴 드라마가 유행했었는데, 왠지 그 드라마처럼 어딘가 날티나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흘렀다.
세련되면서도 무료한 청춘의 잔상이 흐릿한 먹구름처럼 꿈속을 덮고 있었다.
계절은 이제 막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이었고 한창 연말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때때로 파티나 클럽에 놀러 간 것처럼 시끄러운 음악과 푸른 조명 아래 있을 때도 있었다.
멀리서, 어울리지 않게 배경음악처럼 알라딘의 "A Whole New World"가 크게 울려 퍼졌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지도, 즐겨 듣는 노래도 아니었는데 그 노래를 듣자 이상하게 기분이 울렁거렸다.
친구들 사이의 중심에는 항상 주목받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는 마치 모델처럼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센치한 기질과 성숙한 분위기를 지닌 그녀를, 편의상 '모델'이라고 부르겠다.
또 다른 친구는 안경을 낀 수더분한 범생이었다. 이 친구는 '범생이'이라고 부르겠다. '범생이'는 이성적이고 다소 미련스러울 만큼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매사 적당히 눈치껏 행동하는 나까지,
우리는 언제나 함께 다니는 삼총사였다.
셋이 뭉치면 꼭 한 명쯤은 약간 소외되기 마련이다. 우리도 그 법칙에 충실해서 나와 '모델'이 유독 친했다.
당연했다. '범생이'는 든든하긴 했지만 꽤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모델'은 평소에도 퍽 감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최근에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는 가끔 파티에 가서 시끄러운 음악 속에 묻혀 시간을 보내거나 손을 잡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델'은 날이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었다.
나와 '범생이'는 슬슬 '모델'이 걱정됐다.
"쟤 요즘 고민이 많은 것 같지 않냐? 우리가 좀 더 챙겨주자."
꿈속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심장과 연동되어 있는, 실제 심장과 거의 흡사한 모양의 전자기기가 존재했다.
일명, '심장 블루투스'
이 장치는 실제 심장처럼 좌심방과 우심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좌심방과 우심방에서 길게 뻗은 선 끝엔 마치 갤럭시 노트 펜처럼 생긴 디지털 펜이 달려있었다. 두 펜은 블루투스 주인의 마음을 적어내는 기능이 있었는데 오른쪽으로는 주인의 속마음을, 왼쪽으로는 겉마음을 적었다. 그건 마치 두 개의 고백처럼 느껴졌다.
'모델'은 그 기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범생이'와 내가 그녀를 걱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델'이 학교에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는 교무실 근처에 몰래 숨어 선생님들의 대화를 엿들었고, 가출이나 실종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델'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단서를 찾기 위해 우린 자율학습실로 달려가 그녀의 책상을 샅샅이 뒤졌다.
그때 책장 한쪽에서 심장 블루투스를 발견했다. 곧바로 블루투스의 전원버튼을 눌렀고 기기에 달린 펜을 하나 집어 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오른쪽을, '범생이'는 왼쪽을 선택했다. 그러자 펜들이 그녀의 마음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가 이걸 발견할걸 그녀가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두 펜의 필체는 각각 달랐다
왼쪽은 키보드로 입력한 것처럼 반듯한 글씨였고 그녀가 처한 상황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느낌이었다.
그 문장은 '범생이'가 읽었기 때문에 나는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반면 오른쪽 펜은 손글씨처럼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삐쭉하게 써 내려갔다. 내용도 다분히 추상적이어서 한 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아. 그동안 네 곁에서 보낸 모든 시간들에 감사해. 너와 함께해서 정말 즐거웠어.
하지만 이제 난 가야 할 곳이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 얼마 전에 내 앞에서 유리가 크게 깨지는 사건이 있었거든. 깨진 유리조각들을 보는 순간 나는 무엇에도 저항할 수 없었고 그저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의무를 느꼈어. 이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걸. 너에게 이런 상처를 남기게 되어 미안해... 잘 지내."
펜은 편지를 마치고, 내 얼굴까지 정성껏 그린 뒤 천천히 멈춰 섰다.
그녀가 위험하다는 직감이 든 나는 곧바로 자율학습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다가 잠에서 깼다.
꿈에서 깬 뒤 깨달았다.
모델도, 범생이도 둘 다 나였다.
그때 내가 깨뜨려 숨겨둔 유리조각은 아직도 마음 한 편에 조용히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